교회 문제 상담

교회개혁 2012. 8. 27. 19:25
1년 동안 교회문제 상담을 쉬기로 했다.

2006년 12월, 개혁연대 전임 구교형 국장님이 하셨던 상담기록을 보는 것으로 나의 교회문제 상담은 시작됐다.
기막힌 사연과 사건들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던 그 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난 목사의 비리, 교회 문제 해결에 깊이 빠져서 살았다.
쉼 없이 달려온 탓인지 탈진한 증상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
모르는 전화, 제보자들의 번호가 뜨는 벨이 울리면 덜컥 겁이 나는... 그러나 받지 않을 수 없는... 결국 전화를 받고, 한 두시간의 답답한 분쟁현장에 빠져 들고... 힘들어 하고... 다시 전화가 오고... 반복되며 나는 더욱 지쳐갔다.

결국 개혁연대 협동사무국장 직을 내려놓고 당분간 교회 상담을 쉬기로 했다. 동지들에게 짐을 떠 맡기고 혼자 도망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교회갈등, 목사 성문제, 사기, 부패한 조직... 치열한 영적 싸움의 현장에 남겨진 전우들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사진은 후임 남오성 국장님과 지난 수년간 왔던 상담 프로세스와 노하우를 정리한 내용이다. 상담 메뉴얼을 만들기 위해 개혁연대를 방문하여, 교회문제 상담소에서의 마지막 업무를 하고 온 것이다. 남국장님은 웨신에서 교수를 하며 교무행정을 하셨던 경력을 가진 분 답게, 거칠게 말로 풀어내는 나의 경험과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해내셨다.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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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내가 아닐진대 당신들은 더더욱 아니다!"

 

덴마크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던 이들을 향한 키에르케고르의 일갈이다. 십 수년전, 내 귀에 꽂힌 이 말은 신앙의 연수가 더해갈수록 더욱더 선명해져 왔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그곳 시민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는 조국교회의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부패한 교회 지도자들,그리고 신앙과 무관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그는 분노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사명을 그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일깨우는 것이라 여겼다.

 

그간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타인을 향한 비판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케에르케고르 자신에 대한 선언이었다. 믿음, 제자도, 십자가, 헌신, 사랑 등 그의 묵상 속에서 그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을 했왔다. 하지만 오늘은 '나는 아니다'에 더해 '그러니 더는 더더욱 아닌 것 같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종합적으로 곱씹어 본다.

 

이광선목사 길자연 목사의 야합(언론 보도 이면에 있는 이들의 정체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명박 장로의 거짓과 꼼수. 이 두 가지 소식을 접하며.....

 

'나는 목사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너희들은 더더욱 아니다!'

 

2011년 6월 2일. 한기총 사태를 바라보며.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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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지난해까지 3년간 사무국장으로 활동한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인들을 상담하며 얻은 결론이 있다. 교인들의 과도한 섬김은 목사를 변질시키며, 목사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한은 목사를 부패하게 할 뿐 아니라 교회를 병들게 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교회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민주적 교회를 만들어서 목사가 설교와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목사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엡 2:20~22)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전문 지식과 통찰력이 반영됨으로써 목회의 효율도 극대화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적 교회를 만드는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목사가 가지고 있던 권한을 나눠 주는 일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교회 내에 민주적 소통을 이뤄 내는 과정도 말처럼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교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이 글에서 평신도들이 교회의 주체로 서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민주적 교회를 만들기 위해 목사와 성도들이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 것인지, 민주적 교회는 어떤 모양일지, 어떻게 권한을 나눠 줄 것인지에 대한 도움을 얻게 되길 기대한다.

 

문제 발생은 목사와 성도 간의 단절에서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강단에서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우리 교회 참 좋은 교회입니다." 내용인즉슨, 성도들끼리 다투지 않아 평안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점심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간접적 표현으로) 본인 설교는 늘 은혜 충만하고….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교인들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인 중 대다수는 오히려 목사의 설교 때문에 더 깊은 갈증을 느꼈고, 교회 생활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담임목사는 진심으로 자신이 말한 대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목사와 성도들이 체감하는 교회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이토록 괴리가 심할 수 있을까.

 

그 교회에 다니는 성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소위 '인(人)의 장막'에 갇힌 목사와 성도들 간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목사 자신이 귀에 달콤한 말만을 전하는 측근(?)에 둘러싸여 교회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목사와 성도들 간의 이러한 '소통 두절'은 필자가 그 이후 경험했던 교회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담임목사나 소수의 장로에 의해서 독재적으로 목회(운영)되고 있는 교회들의 공통적 현상 중 하나는 바로 '소통의 단절'이다. 독재적 지도자 옆에는 항상 간신배가 있기 마련이다. 교인들의 요구나 정서와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피드백만을 전하는 무리들 말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무한 긍정의 견해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착각에 빠지게 하고, 소위 말하는 '자뻑(?)의 감옥'에 갇히게 한다는 것이다.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한다'는 이의용 교수의 말대로 많은 교회들이 소통의 불통으로 인해 아파하고 있다.

 

서울 홍제동 S교회 역시 '소통'이 '불통'되는 교회였다.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할 제직회는 늘 요식적인 진행으로 불통을 확인하는 현장이었다. 모임 시간도 예배를 마치고 식사하기 전이다 보니, 심도 있는 토론을 하기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고, 당연히 제직들의 참여가 저조했다.

 

이 교회는 최근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신도사역협의회'를 만들었다. 평신도사역협의회의 구성원은 제직회의 부장·차장과 자치회(남선교회·여전도회·청년회·학생회)의 회장·총무, 보직이 없는 항존직들이다. 이 자리에는 목사도 1/n로 참여한다. 모임은 분기마다 1회로 하고, 충분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교회의 주요 사역을 모두 마친 주일 늦은 오후에 모인다.

 

둥그렇게 둘러앉는 좌석 배치로 진행자와 참여자의 차별을 최소화하였다고 한다. 이 모임은 연령이나 직분에 차등 없는 발언권으로 수평적인 논의 구조가 정착되었다. 최근에는 제직회보다 더 많은 숫자가 참여하고 있으며, 제직회에서는 잘 발언하지 않던 여자 집사들의 참여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슈들을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김장하기, 주차장 포장, 에어컨 보수 등)

 

의사 결정 권한은 없으나 간담회 형태로 충분한 협의를 거쳐 민의와 여론을 당회와 담임목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해 성도들은 교회의 사역이 목회자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성도와 목사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고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공동 목회

 

1986년 개척한 새민족교회(예장통합·목사 김영철)는 1999년 말, 새로운 세기에 걸맞은 교회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한 논의에서 두 가지 방향을 설정했다. 하나는 교회가 지역 사회를 향한 문화적 기능을 감당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의 깃발을 다시 일으켜 평신도 운동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이다. 논의 끝에 평신도 중심의 기획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위원회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운영위원회라는 이름을 거쳐 2003년 '교회위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위원회는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교회 운영의 중심 기구로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공동 목회를 하는 틀이다. 위원은 선출직 직분자 3명(장로 1명, 권사와 안수집사 중 2명), 등대(다른 교회의 목장, 혹은 구역) 대표 3명, 교사 대표 1명, 담임목사, 젊은이교회 1청년 대표 등 9명으로 구성한다. 이들은 교인 총회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2년으로 한다. 단, 1년 이상 휴무한 뒤에는 다시 선출될 수 있다. 특별히 교회위원회 위원장은 목사가 아닌 평신도 제직 중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새민족교회의 규약은 교회위원회가 교회 운영에서 기본 운영 방침, 사업 계획 수립, 재정 운영 계획, 인사, 선거 관리, 목회자 청빙, 교회 전 기관과 부서에 대한 감독, 교인 총회에서 위임한 사항, 기타 다른 기관이 담당하지 않는 업무를 관할하는 심의 의결 기구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당회와의 관계다. 교회위원회의 직무가 보통의 장로교단 교회의 당회가 하는 직무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든 민주적 운영을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될 때, 기존 교회 구조의 당회 직무와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게 된다. 새민족교회의 경우는 당회의 의사 결정 기능을 배제시켰다. '장로'에게는 말 그대로 교회의 어른으로서 교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임으로 교우들의 신앙을 살피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리고 장로교단에 소속된 교회로서 불가피하게 관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회(노회, 총회)와의 법적 역할을 수행하게 해서 불필요한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평신도와 목회자가 공동으로 목회하는 민주적 운영 구조를 만들기 위해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노력해 온 새민족교회는 2010년 현재 제8기 교회위원회가 활동을 하고 있다.

 

평신도 사역의 주체가 되기까지

 

매년 초, '이런 교회 다니고 싶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있는 예인교회(독립교단·목사 정성규)도 평신도 중심으로 사역하는 대표적 교회다. 예인교회의 경우 운영위원회가 새민족교회의 교회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11월 개척한 예인교회는 설립 과정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의 교회가 담임목사를 포함한 극소수의 교인들이 건물부터 임대해 놓고 사람을 채워 가는 형태인 반면, 예인교회는 50~60명의 '사람'들이 모여 시작하였다. 교인 중 대다수가 이전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전횡으로 인한 상처를 가진 분들이었기에,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운영은 민주적으로, 소유는 최소한, 나눔은 최대한'이란 모토를 전면에 내세웠다. 시작은 그럴 듯했으나, 민주적 운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교인들은 그동안 신앙 여정이 수동적이고 의존적이었기에 교회 일을 주체적으로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호소를 했다. 심지어 운영위원회에서 '주일 날 김밥을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결정조차도 자신들이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담임목사에게 결정을 부탁하였다. 과거 교회에서 '성직 vs. 세속'이라는 극단적 이원론에 세뇌되어,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상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담임목사나 평신도 모두를 당황케 했다. 정성규 담임목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에게 부여되고 있는 권한을 장기간에 걸쳐 이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은 '신앙 용어 바로 알기'라는 성경 공부 과정을 통해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여, 성도들의 잠자는 의식을 깨워 나갔다. 이와 병행하여 자신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지만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고, 발언조차도 최소화하며 모든 결정권을 성도들에게 맡기고 기다렸다. 정 목사의 이런 태도는 진행되는 일을 더디게 하였고, 이로 인해 성도들은 큰 부담을 느꼈다. 그야말로 '비효율적'이었다.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 목사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최근에야 결과를 보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개척 10주년을 맞는 올해 비로소 정 목사는 모든 행정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목사의 주인 의식, 평신도의 주인 의식

 

주의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은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이에겐 당연하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는 결단이, 어떤 이에겐 군중 속에 숨어 안주하고 싶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아픔이 요구되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건강한 교회 만들기의 모범 답안이 될 수 없으며 특별한 장치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교인과 교인, 목사와 평신도 간의 건전한 소통을 위한 진실한 노력이 건강한 교회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또한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질 뿐 아니라 자신의 짐(때로는 '짐'이 '기득권'일 수도 있겠지만)을 서로에게 믿고 이양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대다수 교회의 문제는 목사의 과도한 주인 의식에서 비롯한다. 건전한 애정의 발로로서의 주인 의식이 아니라 과도한 소유욕에서 비롯한 독재적 성향이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다. 이는 당연히 교회의 건강성을 해칠 수밖에 없다. 평신도가 교회 운영에 대해서 순종과 은혜의 원리를 내세워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 역시 같은 문제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서는 그 권한을 또한 당신의 백성에게 위임하셨다. 목사는 '성도'에게 위임된 그 권한을 왜곡된 신학을 내세워 독점할 것이 아니라 평신도와 함께 진리와 사랑으로 공유해야 할 것이다. 또한 평신도들은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감당해야 할 소명이 있다.

 

평신도들이여, 교회의 머리는 당신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며 당신은 그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일무이한 '지체'임을 스스로 일깨우기 바란다. 그러할 때 그분의 몸은 더 이상 독재와 부패로 신음하지 않고 건강과 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복음과상황>2010년 3월호.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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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목사님들의 모임 슬로건이 '목사도 천국가자'라는 말을 듣고 공감하며 크게 웃었다. 내가 '우리도 천국가자'는 목사님들의 구호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목사들이 천국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교회문제상담소를 통해 수많은 '문제(?) 목사'들을 접하다보니 이런 발칙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내담자 A집사는 지인을 전도하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소개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 교회 담임목사의 인격이 너무 부끄러워, '우리 교회 나오지 말고, 자네 동네 교회로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 교회 목사의 인격이 너무 상식 이하라며, 교회 안 다니는 일반인들(?)의 평균 수준만 됐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모든 목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목사님들도 적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그러면 '모든' 목사들이 자신을 그 '적지 않은 선한' 목사로 생각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말하기는 했다.) 물론 글을 쓰는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나 자신도 목사로서 그 위험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을 가끔 자각하게 된다. 삶은 그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선한 목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볼 일임을 고백한다. 작년 한해 동안 200회가 넘는 교회 문제를 상담하면서 절감한 바는, 목사들이 심히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목사의 이러한 모습이 교회 분쟁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고치는 목사가 '믿음'이 좋다?

 

한국의 대다수 교회가 지닌 신학에 따르면, 우리도 천국 가자고 외치는 목사는 목사로서 자격이 없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런 나약한 믿음으로 어찌 목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사고 치는 목사'는 믿음이 투철하다.

 

오래 전 여자 문제와 돈 문제로 교회를 발칵 뒤집어 놓고도, 자리를 지키며 버티던 B목사에게 선배 목사가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지옥가고 싶으냐'며 충고를 했단다. 그러자 B목사 왈, '믿음으로 구원받지 행위로 구원받습니까?' 우리도 천국 가자는 목사님들의 외침이 반가운 것은, 보기 드물게도 이분들이 스스로를 성찰하는 분들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왜 이렇게 상식 이하의 목사들이 많은가? 개혁연대에 제보되는 목사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는가? 아마 처음부터 '진정성' 자체가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내담자들이 심심치 않게 하는 이야기가 '우리 목사님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엔 좋은 분이었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이 변하더란다.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성도들의 과도한 섬김이 목사를 망친다

 

내담자 C장로의 분석에 따르면, 성도들이 맛있는 것, 좋은 옷, 좋은 차를 갖다 바치고 섬겨주니까 교만해져서 그렇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목사로서 지금도 얼마나 과분한 섬김을 받고 있는가. 가끔 그런 과분한 섬김을 당연하게 받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스스로를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며, 섬길 것을 강요하기도 한단다. '주의 종'이란 말이 무색해진다. 처음 목사가 될 때 초심이 어떠했든지, 생각이 이렇게 뻔뻔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에게서 다른 뭘 더 기대하겠는가.

 

설교에 대한 피드백도 큰 역할을 한다. 우리 한국 사회, 한국교회에서 누가 설교자에게 부정적 반응을 보이겠는가. '은혜 받았습니다' 일색이다. 자신이 설교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드물 것이다. 얼마 전 S교회 장로들이 자기 교회 담임목사가 다른 목사 설교문을 그대로 베껴 설교하는 걸 알게 되었단다. 장로들이 모른 채 하며 '우리 교회 상황에 맞는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하자, 목사는 오히려 '내가 우리 지역에서 설교 제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역정을 내더란다. 이런 지경이다보니 성도들 앞에서 '모른다' 소리도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는 듯 착각한다. 심지어는 성도들의 사업에까지 관여하고, 부동산 투기 상담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대형 교회 목사가 설교 중에, '자신이 교인들에게 사라고 땅을 지정해주면 땅 값이 몇 십 배 오른다'며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이래저래 목사들은 교회라는 성 안에 갇혀서 정작 세상이 자기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목사들의 의식이 세상의 상식으로부터 격리되어 게토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목사님들이여, 착각하지 마시라.

 

목사를 무당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목사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가 있다. 목사 스스로뿐 아니라 성도들이 목사를 하나님과의 중보자로 착각하는 것이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도들의 이러한 인식은 한국인의 종교의식 밑바탕에 깔린 무속신앙에서 뿌리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일부(?) 목사들이 이를 악용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든 아니든 목사들 자신이 스스로를 성도들과는 다른 어떤 존재로 여기기 시작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무당이 된 목사에게 도덕성이나 윤리성은 중요하지 않다.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과 선포는 오히려 불편하다. 기적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홍보하고, 강한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압도하는 그런 목사가 능력 있는 종이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능력과 카리스마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사들의 능력으로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지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대한다. 능력의 종! 기복주의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목사가 아닌가? 하지만 이로 인해 목사와 성도들 모두 심각하게 병들고 변질 되는 것이다.

 

목사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한이 목사를 망친다

 

목사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한 역시 목사를 병들게 한다. 각 교단이 가지고 있는 '헌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헌법'이라는 것은 한 국가 통치 체제의 근본이 되는 최고 법규를 말하는 것인데 버젓이 '헌법'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용어 사용에서부터 '헌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목사들의 권위 의식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헌법'의 내용은 어떠한가? 독소조항투성이다. 모든 권한을 담임목사가 가지고 있다. 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회의체의 의장을 담임목사가 맡는다. 장로교의 경우 당회장, 제직회장, 공동의회장을 모두 담임목사가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헌법'에 보면, '목사의 의의'를 이렇게 규정한다. '양의 무리를 감시하는 목자', '그리스도의 사역자', '신약의 집사', '치리하는 장로', '교회의 사자(천사·계2:1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사신',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 등등.('헌법' 제4장 제1조) 이러한 내용은 타교단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하다. '헌법'에 따르면 목사는 법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감히 평신도가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다.

 

한국교회는 개 교회 목사에게 그런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음에도 이를 통제할 장치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다수의 목사들은 북한에 대해 목숨 걸듯 비판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그들과 꼭 닮아 있는가? 비민주적이고, 반대 의견은 철저히 묵살하는 행태는 김일성 정권과 못지않다. 게다가 세습까지 하는 걸 보면 그야말로 독재다.

 

목사 제자리 찾아주기

 

 

이렇듯 왕처럼 섬김 받고, 자타 공히 하나님의 천사라 여기며, 무소불위의 법적 권한을 부여 받은 목사들이 겸손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렵다. 자칫하는 사이 자신을 하나님 바로 다음 자리에 앉히기 쉽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을 기억하라. 절대 권한을 부여 받은 목사는 '부패'와 '변질'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저 추상적인 규정이 아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 목사 개인의 인격이나 믿음만을 믿고 맡기기엔 너무 위험하다. 교회도 위험하고 목사도 위험하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한국교회에는 교회의 분란이 잠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목사들에게 그런 자리에 서게 되더라도 교만해지지 말고 겸손하라고 요구만 하면 될 것인가. 이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놓고 참으라 하는 격이다. 혹시 대단한 영성을 소유한 몇몇 고양이가 참아낼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고양이는 생선을 먹고 말 것이다. 현재의 이런 구조는 목사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에게 기대하기 어렵다면, 성도들이 깨어날 것을 기대하겠는가. 성도들이 누구에게 교육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시라. 왜곡된 자기 정체성을 가진 목사들이 가르친 성도들에게 깨어나길 기대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목사가 겸손한 자세로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교회에 민주적인 정관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민주적 정관 도입을 통해 목사, 혹은 소수의 장로에게 편중된 과도한 권한을 제한하고, 교회의 주권을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정관 도입만으로 교회 내 모든 비성경적인 권위주의 문제와 그로 인해 불거지는 문제들이 일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민주적 정관을 도입해 운영하는 것은 교회 분쟁 원인인 목사에게 집중된 권력 문제와 부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건강한 목사,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를 통해 목사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인 올바른 해석을 위한 말씀 연구와 선포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담임목사의 독재 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실하다.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는 중세의 사제주의와 권위주의에 저항했던 개신교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모든 권한을 향유하고 있는 목사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하고, 교회의 주권을 교인들에게 돌려주어 성경이 기대하는 바, 민주적인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교회의 민주적 운영에 관하여는 백종국 교수의 저서 를 참고하라.)

 

2009. 7. 16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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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공짜로 최신 기종을 준다는 TM(Telemarketing)에 속아 핸드폰을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몇 달 안 돼 고장이 나서 대리점에 가져갔더니 이 기종은 실패한 모델이라서 찾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금도 처음 얘기와 달리 과다하게 청구됐습니다. 처음 통화했던 분에게 항의 전화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 보라더군요.

 

몇 사람과 통화를 하고 난 이후에야 제가 전라도 전주 어딘가에 있는 대리점에서 전화기를 구입한 걸 알았습니다. 따져 물으니, 고압적 태도로 본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와의 통화가 녹음된 파일 내용을 들려줬습니다. 들어 보니 수차에 걸쳐 제게 전화하며 꼬였던 핵심 내용은 쏙 빠져 있고 제게 불리한 내용만 녹음이 되어 있더군요. 꼼짝없이 당하게 됐습니다.

 

시민 단체의 힘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리고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정의감까지 생기니 전의가 불타오릅니다. 수십 차례 대리점에 전화하여 따지고 또 따졌습니다. 나중엔 대리점에서 전화도 안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단계로 소비자고발센터(한국소비자원)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약속한 내용을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같은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며, 방송에서 보도도 됐는데 못 봤냐고 덧붙입니다. 실망스러웠지만 공기관에서 하는 공적 업무이니만큼, 그 이상 막무가내로 졸라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예전 간사로 일했던 '생활개혁실천협의회'의 회원 단체인 '소비자시민모임'이 생각났습니다. 줄여서 '소시모'라고 부릅니다. 바로 전화를 돌려 신고를 했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접수를 받아 준 간사님은 친절하게 "알아보고 연락을 줄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며칠이 지났을까, 전주에 있는 대리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전의 고압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친절하고 간사스러운 목소리로 "뭘 원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제가 요구만 한다면 백지 수표라도 줄 기세였습니다. 결국 모든 걸 환불받았습니다. 그리고 소시모에 접수한 걸 취소해 달라는 사정을 들었지만, 그건 그리 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순진한 소비자들을 위해서 이런 시민 단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담임목사직 팔다 들통 난 목사의 버티기

 

지난 1월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교인들 몰래 교회를 팔려던 시도가 들통이 났습니다. 담임목사와 후임 목사 간에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계약금까지 오간 상태였죠. 황당한 교인들이 목사에게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아직 50대인 이 목사는 "나도 퇴임 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되레 큰소리를 뻥뻥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은퇴비 1억 원을 내놓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목사가 계속 남아 있겠다는 말은 교인들에게 엄청난 협박이었습니다.

 

20명 남짓한 규모의 교회에서 은퇴금 1억 원이 웬 말입니까. 교인들의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간 목사 부부가 재정을 관리해 오면서 보였던 재정 횡령 의혹까지 더해 목사에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교회 건물이 내 명의로 되어 있으니 내 것이고 그걸 판다고 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다"고 주장하고, 변호사 자문까지 받아 왔다며 배를 내밀었습니다. 나갈 사람은 나가라는 거지요. 교인들은 노회에 호소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목사가 "이 모든 일을 노회의 허락(혹은 도움)을 얻어 했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노회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기자 무서워 줄행랑

 

마침 그때, 교인들이 방송 보도를 통해 교회개혁실천연대와 를 알게 됐습니다. 제보를 받은 저와 기자가 연달아 전화를 하자, 목사는 꼬리를 내리고 교인들 앞에 사죄했습니다. 그리곤 퇴직금 얼마를 받고 도망치듯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마도 '아무런 힘없는' 교인들 뒤에, '힘 있는' 단체와 언론이 버티고 섰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나 봅니다.

 

제가 수많은 교회 문제를 상담하면서 내린 잠정적 결론은 노회(혹은 지방회)가 개혁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혁 교단' 운운하지만 개혁은커녕 불의를 묵과하거나 타협하는 일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밥그릇 지키는 데 열심을 낼지언정, '정의'나 '공의'를 지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목사의 간통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아무런 징계도 하지 않는 경우를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치리 기능이 마비된 노회

 

'치리'라고 하는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역기능을 통해 부작용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순진한 성도들이 목사들에게 속고 노회에 또 속아도, 어디 누구라도 도와줄 이가 없는 겁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교회의 경우처럼 개혁연대나 에 제보했다고 해서 문제가 단칼에 해결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못된 목사에게 속고, 노회에 또 한 번 당한 교인들이 호소하고 비빌 언덕은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힘없는 교인들'에게는 그들 편에 서서 함께 울어 주고, 그들을 지지해 줄 그런 기관이 절실합니다.

 

어떤 분들은 "왜 꼭 교회나 목사의 치부를 들추고 있냐", "왜 자꾸 부정적인 이야기를 보도하냐"며 항의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정이 이렇습니다. 목사의 범죄를 발견한 교인들의 보통의 반응은, 일단 쉬쉬하는 겁니다. 몇 번 회개의 기회를 주고 문제 해결을 시도하다가, 조용히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이제 고발이나 공론화를 생각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단단히 심호흡을 하고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이 알려지기만 하면 교계와 온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힐 것이고, 목사의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대부분 빗나갑니다.

 

교회 문제 다루기 꺼리는 경찰과 언론

 

검찰이나 경찰에 고발을 해도, 교회가 특수 집단이라는 이유로 판결을 꺼립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언론은 물론이고 교계 언론마저 다뤄 주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기자와 경찰서는 조폭과 종교 문제는 다루기 싫어한다는 말이 나돌겠습니까. 설사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도, 목사가 교회를 나가지 않고 버티기 시작하면 교인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목사 뒤에는 노회(혹은 지방회)라는 든든한 '백'이 있으니까요.

 

이쯤 되면 교인들은 '과연 이 땅에, 한국교회에 정의는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법으로도, 교단 법으로도 처벌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교회 안 여론조차도 죄를 범한 목사를 감싸고돕니다. '설교권'을 가진 목사가 강단을 변명하고 여론 몰이를 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자한 얼굴과 언어로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교인들은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교인들이 밀려오고, 또 속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2010년에 쓰는 선지서

이들에게 는 마지막 희망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모든 언론이 보도하기를 거부해도 만큼은 범죄자의 불의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가 이 시대의 선지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 시대를 향해 죄를 고발하고, 선지서에 기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의 이러한 보도는 더 이상 이런 목사로 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습니다.(2007년에는 못된 짓을 하고 교인들 몰래 미국 교회에 이력서를 냈던 아무개 목사의 시도가 기사로 인해 성공 문턱에서 불발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끔 보면, 세상 법정도, 노회도, 교인들에게도 안하무인인 목사가 에는 벌벌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의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목사의 이름만 검색해도 그의 불의한 행동이 모두 들통 나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러한 의 사명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애정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고, 후원도 하고 있습니다. 가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동무' 1천 명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를 살리는 이 길, 함께 동참해 주십시오. 교회가 심하게 부패한 지금, 같은 언론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0. 3. 31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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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 년 동안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상담한 목회자의 성 추문 관련 사건들을 종합해 보면, 가해 목사들이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유사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추문이 불거지게 되면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문제의 특성상 이런 목사의 주장이 먹혀들어 가 끝까지 진실 공방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증인이나 녹취 파일 등 부인할 수 없는 자료가 나올 경우엔 더 이상 우길 수가 없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피해 여성이 이단이라며 마녀사냥 식 덮어씌우기를 시작한다.

 

필자는 이번 ㅈ목사의 성추행 사건의 전말을 지켜보며 매우 크게 실망하였다. '한국교회의 차세대를 이끌 명 설교자 ㅈ목사'의 성추행 자체에 대한 실망이야 말할 것도 없다. 우선 직무를 유기하는 ㅅ교회 당회의 결정이 그렇다. 그 교회의 장로들이 사적으로야 목사님을 이해할 수도 있겠고 존경하던 목사에게 선대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한다. 교회의 분란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인 생각 또한 이해된다. 사실 피해자와 성도들이 비분강개하는 이유도 목사가 성추행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필자가 교회 문제 상담을 하며 느꼈던 것은 성도들이 목사의 성 문제에 있어서 이상하리 만큼 관대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목사도 남잔데 한번쯤 실수할 수도 있지"라며 가해 목사에 대한 정죄를 자제한다. ㅂ목사, ㅊ목사는 수습 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성추행 보다 더 추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정성까지도 의심을 하게 만든 것이다. mc몽과 신정환. 시청자들이 그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군 입대를 피하기 위해 생니를 뽑았다거나, 거액이 걸린 도박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청자들이 그들을 버린 이유는 범죄 이후 반성하지 않는 그들의 뻔뻔한 태도 때문 아닐까. 목사의 이런 부정직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성적인 문제를 넘어서(실수라고 생각했던 경우), 목사로서의 기본적인 자질 문제로 확대된다. ㅊ목사의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외도한 것이 들통 난 ㅊ목사는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일삼고, 최초에 문제를 제기하는 성도를 모함했다. 결국 ㅊ목사는 성 추문이 촉발되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당회원들과 교인들이 ㅊ목사를 끝내 포기하게 된 것은 그가 외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후 그가 보였던 거짓되고 가증스러운 태도 때문이었다. 이러한 고통과 혼란스러움을 감당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주변 지인에게 털어놓게 된다.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피해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과 정의감으로 목사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따지게 된다. 그러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목사들은 '그런 적 없다'며 잡아뗀다.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지'라며 순진한 생각을 하던 피해자나 성도들이 가장 분노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아니라고 잡아떼거나, 문제를 무조건 덮으려고만 하는 목사의 뻔뻔한 태도로 인해 그에 대한 일말의 기대심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의 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공론화가 되는 경우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질 줄 몰랐으며, 이런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저 목사님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고, 그분이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 추문 관련 상담 사례의 경우, 피해자나 성도들의 반응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다. 처음 목사가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추행할 때, 전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당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아버지처럼 따랐던 목사의 권위에 눌렸기 때문이거나,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 상황에 충격을 받아 판단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장을 벗어난 피해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충격과 고통이 더 심해진다. 목사의 성추행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여성에 대한 성적인 학대일 뿐 아니라, 목사의 영적인 권위로 짓누른 영적 학대이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목회하던 ㅂ목사의 경우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는 여러 명의 여성도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일삼아 왔다. 모든 피해자들은 자신이 당한 끔찍한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속앓이를 하였고, 이로 인해 목사의 추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피해자가 친구에게 이야기함으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목사는 부인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속속 나오면서, 더 이상 목사는 아니라고 우길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목사는 피해자들을 '신천지 이단'이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사실 성 문제가 아닌 경우에도 이런 마녀사냥식 덮어씌우기 사례는 적지 않다. '2009년 교회문제상담소 상담 통계'에 따르면, 문제 제기를 하는 성도들을 이단으로 몰아간 경우가 전체 상담의 18%였다. 만약 목사의 개인 비리나 부정에 관한 사건으로 국한한다면 그 수치가 훨씬 더 높을 것이고, 목사의 성 문제의 경우는 90% 이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당회원'이 누구인가. 당회원은 일개 청년 리더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교회의 질서와 정의를 세워야 하는 공적 직무와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이 사건을 면밀히 살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것인지. 만약 그랬다면 주위에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이들의 '심각한 수준'의 인식과는 왜 다른 판단을 한 것인지. 그리고 그런 사실을 토대로 정말 교회와 교인들, 그리고 ㅈ목사를 위하는 판단을 한 것인지 의문이다. 만약 이런 해결 방식이 교회를 위한다거나 목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ㅅ교회 당회원들은 왜 교인들로부터 부여 받은 권한을 가지고 자신들이 선심을 쓰고 있는가. 누구를 위한 선심이며 무엇을 위한 선심인가.

 

목사의 성추행이 '실수'인 것을 입증할 방법은, 그 사건이 드러난 이후 얼마나 정직하고 겸손하게 수습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부디 ㅈ목사가 이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입증할 기회를 놓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바로 ㅈ목사 본인이 지난 2007년에 죄에 빠져 회개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쓴 칼럼이다.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는 누구보다도 파렴치한 성범죄에 청부 살인까지 저지른 잔혹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태도를 인정하셨다. 안타까운 것은 ㅈ목사의 주변에 나단 선지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단의 역할을 해야 할 당회는 선지자적 사명을 내팽개치고 있다. ㅈ목사는 외부에서 들리는 수많은 나단의 외침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외침들이 자신을 음해하거나 교회를 흔들려는 사탄의 계략으로 여겨진다면, 다음의 말씀은 어떠하신지. 의 보도대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이들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했을 정도라면, ㅈ목사는 스스로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최초 ㅈ목사 스스로 사임을 할 정도의 사안이었다면(그것이 단순한 쇼가 아니었다면), 왜 지금에 와서 '교회의 결정'에 따른다며 자신에게 너무나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는가.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갑작스레 떠나게 된 안식년을 "미자립 교회를 찾아서 그들 교회에 영적, 물질적 공급을 해 주는 '저수지 교회'가 되겠다"며 미화하는 태도는 또 무엇인가. 이런 반성 없는 태도는 ㅈ목사에 대한 실망을 더욱 커지게 한다. 만약 그런 상태로 설교와 목회를 계속하게 될 때, 그의 설교를 들을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ㅈ목사 자신을 위해서도 이런 식의 해결은 너무나 위험하다.

 

2010. 9. 24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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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의도하지 않게 채널을 돌리다 기독교 케이블 방송을 통해 설교를 '보는' 경우가 있다. 굳이 설교를 '본다'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이 설교자들의 설교가 그야말로 쇼(show)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개그맨이라도 되는 양 웃기려 애를 쓰시고, 트로트 가수처럼 찬양을 꺾어 부르며 박자에 따라 간단한 댄스도 하신다.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들의 기대만큼 웃기지도 않다.

 

설교로서 평가하기는 좀 그렇고, 개그로 봐도 너무 저질 개그다. 별의 별 캐릭터가 다 등장한다. 반짝이는 양복 가슴 주머니에 손수건을 꼽고는 멀끔하게 생긴 외모로 어필하려는 목사. 속사포로 말하면서 가끔 심형래 흉내도 내며 바보연기를 하는 목사. 부모라도 되는 양 반말로 성도들을 막 혼내는 '무대뽀' 목사. 밤무대 가수 같이 찬양하는 목사 등등. 이 설교를 '보고' 있노라면 주로 분노가 끌어 오르지만, 때로는 '개콘'과 '웃찾사'에서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개그맨들을 보는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순종하라, 헌금하라, 축복 받는다!"

  

그런데 별의 별 '짓'을 다하는 이들의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다. '순종하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다는 것이다. 얼마 전 상담한 내담자가 자기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가 듣기 괴로운 수준이라며 한탄했다. 1년 365일, 어떤 본문으로 설교를 해도 결론은 '순종하라, 헌금하라, 축복 받는다!'라는 것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이런류의 호소를 자주 듣는다. 방송 설교를 보면서, '아, 이런 기분이구나'하며 그 성도의 고통을 잠시마나 생각했다.

 

그런데 참 희한한 현상은 교회에서든, 방송에서든 그런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내담자의 말마따나 교인들은 교회에 갈 때, 이성과 상식을 주차장에 놓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 의심이 된다. 방송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후원금을 내야 한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긴 하지만(제보도 있었다.), 아무리 많은 후원을 해도 듣는 사람이 없고, 항의 전화가 빗발친다면 어찌 방송이 가능하겠는가.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울의 예견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기 욕심을 따를 것이며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교사들의 말을 들으려고 그들에게 모여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외면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3-4, 현대인의 성경)

 

어쩌면 인지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리, 고난, 십자가, 희생, 제자의 길, 이런 주제가 한두 번 정도야 괜찮겠지만, 계속 듣기는 힘든 내용이다. 하지만 축복, 성공, 부흥 뭐 이런 내용이라면 설교의 수준과 상관없이 들어도 들어도 좋은 것 아니겠는가. 여기가 바로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딤전 3:3)을 채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스타가 되고 싶은' 이런 광대 목사들의 필요가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면서 그 교회를 향해 축복을 외치는 설교는 독(毒)이다

 

내 생각에는 이런 설교들에 대해서 단순히 '수준이 낮다'고 평가하고 말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그저 저질인 것이 아니다. 독(毒)이다. 성도들의 눈을 흐려 놓고, 십자가로의 접근을 차단하고 방해하는 장애물이요, 독인 것이다. 이런 독과 같은 설교는 그저 성도들의 수준을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저질로 비춰지는 설교 뿐 아니라, 상당수의 목사들이 세련된 언어와 고도의 지식을 동원하여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작금의 한국교회가 '세속화 되고, 귀족화 되었다'고 진단은 하지만, 정작 세속화되고 귀족화 된 교회를 향하여서는 축복과 평강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평강하다 평강하다'만을 외치며 백성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 결과는 멸망이었다. 한반도, 한국 사회와 교회, 그 한 복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평강과 축복만을 외치고 있는 그들은 '망하게 하는 자'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설교의 홍수 속에 기근과 기갈(飢渴)

 

설교 방송, 설교 테이프, 설교집, 그야말로 설교 홍수의 시대이다. 그러나 정작 그 설교의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요 기갈(飢渴)이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신 그 심판의 때가 생각난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아모스 8:11b-13)

 

진정 지금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정직한 선포가 절실한 시대이다. 한국교회가 망하지 않으려면, 변질되고 왜곡된 설교를 버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개혁연대는 지난 2008년 한국교회 개혁의 10대 과제를 발표하면서 그 중 하나를 '왜곡된 성경 해석의 수정'으로 꼽았다. 이는 한국교회가 다시 살기 위해서 뒤틀리고 왜곡된 말씀해석과 선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설교에 대해 질문하자! 설교에 대한 의견 듣자!

 

 내가 존경하는 설교자 J목사가 있다. 그는 한 번의 설교를 위해 본문을 깊이 연구하고 산고를 겪는 듯한 시간을 거쳐 설교문을 작성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설교한 만큼 살려고 치열하게 싸운다. 그의 설교 초년 시절에 항상 그의 설교를 듣고 코멘트를 주는 B집사가 있었다. B집사의 지적은 예리하다 못해 너무 직설적이어서 필자가 옆에서 듣기에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J목사는 B집사의 지적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J목사의 설교가 오버(?)하거나, 논리적이지 않거나, 혹은 현실적 삶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를 할라치면 어김없이 설교를 마치고 의견을 전한다. 그런데 J목사는 그 B집사가 너무 고맙단다. 그를 자신의 좋은 선생님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J목사 같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실 것이다. 맞다. 본인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교는 더욱 그렇다. 필자 역시 설교를 하는 목사다. 그래서 내 설교에 대한 비판을 듣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솔직히 고백하면 가끔 '설교가 너무 길다'는 '정확한'(?) 비판에도 마음이 불편해 지는 것이 사실이다. 주로 '은혜 받았습니다'류의 긍정적인 피드백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만일 성도들이 설교에 대해 솔직한 질문과 평가를 전할 수 있고, 설교자가 이에 대해 답변하는 제도가 도입된다면 우리 한국교회의 설교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박득훈 목사가 시무하는 언덕교회의 경우 예배를 마치고 설교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성도들은 들은 설교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의견을 얘기하고, 설교자는 이에 답변한다. 당연히 설교자는 철저히 준비하게 될 것이고, 성도들과의 대화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은혜가 임하지 않을까 생각 된다. 

 

한국교회의 설교를 건강하고 은혜롭게 하기 위해 이런 제도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우선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 비평에 대해 좀 더 열린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한 성도들 역시 설교에 대해 과연 하나님의 뜻이 담긴 내용인지 살피는 자세도 중요하다. 마치 베뢰아 성도들처럼(행 17:11). 강단에서 어떤 소리를 해도 다 믿어버리거나, 침묵하기 때문에 이런 거짓목사들의 폭주가 계속되는 것이다. 황당한 거짓말로 속이는 거짓목사들의 설교를 분별하고, 교회가 그런 말씀에 오염되지 않도록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경회(査經會)

 

 한국교회 초기, 성도들은 사경회(Bible class)라는 이름으로 모여 말씀을 배웠다. 며칠, 혹은 몇 주씩을 사경회에서 성경을 공부하였다. 김영재 교수는 라는 책에서 '1960년대 이후 성경공부를 하는 모임의 성격이 점차 변질되었다'고 지적했다.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흥사경회, 부흥회로 불리 우는 집회들은 '말씀을 배우겠다'는 목적보다는, 교회 조직의 세를 불리기 위해 동원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또한 '성령대집회', '축복성회' 등의 집회로 모이면서 신도들의 인간적 욕망을 맘껏 충족시켜주고 있다.

 

다시 말씀을 열망해야 한다. 개혁연대는 이 설교 홍수의 시대에 또 하나의 설교의 장을 마련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 많은 성도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맛보고 그것을 더욱 열망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또한 영적 갈증을 느끼는 성도들께서 잠시나마 생수를 체험하시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돌아가자. 그 말씀 앞에 서자!

 

 

2009년 4월 16일.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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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시절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60년 이상 분열되어 있던 4개의 장로교단이 한 자리에 모인 연합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내게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결국 머리보다 먼저 마음이 움직였다. 시작도 하기 전, 참으려 애썼지만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닦으며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지난 이틀간 전쟁터와 같았던 부총회장 선거와 회의를 참관하며 느꼈던 답답함과 안타까운 심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런 모습 그대로 ‘하나됨’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훗날 역사는 과연 이 모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옆에 있던 김애희 실장이 심정을 물었다.

 

“국장님, 소감이 어떠세요?”

 

“만감이 교차하네요.”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뮤지컬 ‘선교사 이기풍’이 상연되었다. 어릴 적 보았던 시골교회에 모여 이기풍 선교사의 영화를 봤던 생각이 났다.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이기풍 선교사가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구렁이에게 온 몸을 감긴 채 사투를 벌이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도 제주 지역에 복음을 전하면서 이기풍 선교사가 겪었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복음의 불모지에서 헌신했던 이기풍 선교사는 100년 후 제주를, 아니 한국교회를 어떤 모습으로 기대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렇게까지 거대한 교단으로 자라날 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세속화될 줄은 더더군다나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의 순수함, 처음의 열정, 그걸 회복해야 하는데.

 

순서지를 들여다보니 정말 많은 순서와 담당자가 있었다. 네 개 교단의 연합예배이니만큼 그럴만도 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연합예배 담당을 놓고 교단간의 갈등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터라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묵상기도, 찬양, 기도, 1930년대 장로교회의 일반적 순서에 따른  역사적 예배가 시작되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변화와 연합을 위한 기도가 간절히, 간절히 드려졌다. “주여!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그 날을 속히 이루어 주소서!” 기도하며 찬양하며 눈물이 계속 나왔다. 감격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초라하고 추한 내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이 슬프고 죄송스러웠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가 시작되었다. 합동 총회장 최병남 목사께서 강단에 섰다. 본문은 사무엘상 17장, 다윗과 골리앗의 결투장면. 거인 골리앗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다윗은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설교자는 서두에 우리 민족이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환란과 시련’, 교회적으로는 ‘사이비 이단’의 위기임을 진단하고 있다.

 

어떤 시대, 어느 국가에도 걸맞을 두루뭉술한 위기진단들 중에 눈에 띄는 구체적인 위가가 하나 있다. ‘북한 핵 문제로 인한 민족의 위기’가 그것이다. 어쨌든 이런 진단과 본문에 대한 언급 이후에 그 처방은 바로 ‘기도’였다. 기도하면 민족도 하나 되고, 교계도 하나 되고, 경제 문제도 해결된다고 한다. 위기에 대한 진단도, 처방도 그다지 동의가 되지도 마음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설교 중간 중간 마이크를 바짝 대고 소리치며 반복하는 문장들 때문에 귀가 불편했고, 그것이 마치 ‘아멘’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마음도 불편했다.

 

예배 중 제주선언문이 낭독되었다. 모든 교단의 염원과 다짐을 담은 선언문이었다. 사치와 향락에 대한 반성, 갈등에 대한 반성, 환경 문제와 세계 도처의 참상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결의,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충만히 임할 것을 기도하며 다짐하였다. 또한 선언문을 통해 이러한 다짐과 결의를 ‘힘써 이행’할 것이며, 이를 위한 후속조치를 강구할 것을 천명하였다. “아멘!” 이렇게만 된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저 ‘선언’이 되지 않기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이 교회 위에 충만할 그날이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모든 순서를 마치고 사회를 보던 통합 총회장 김삼환 목사께서 강단에 나와 있던 지도자들과 청중들에게 회개 기도를 제안했다. 순서에 없던 일이었다. 신사참배에 결정에 대하여, 교단 분열에 대하여,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데 대하여 무릎 꿇고 손을 들고 회개하였다. 그 모습 자체로 감동적인 일이다. 또한, 신사참배를 결정한 지 70년이 지나 4개 장로교단이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자복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신사참배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했었다면 독재정권을 찬양해서는 안 된다. 독재정권을 찬양한 것을 진정으로 회개한다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군사정권에 면죄부를 줘서도 안 된다. 만일 지금 신사참배를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이명박 정권의 불의한 정책에 동조해서도, 침묵해서도 안 된다. 이런 역사를 반복하고 70년이 지난 뒤 우리 후손들에게 회개의 책임을 넘길 것인가? ‘역사’가 지금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숙고해야할 일이다.

 

나는 회개의 제스처가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회개의 언어가 아름답고 추상적일수록 ‘진정한 회개’의 가능성이 낮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런 경우 그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이번 연합예배에 대한 노파심이 크다. 감격하고, 부둥켜 안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돌리고... 그걸로 만족하고 끝내지 말기를. 이 모임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와 변화, 하나됨의 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2008년 10월 10일.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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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 한국교회는 사회의 '앞섬이'였다."

 

숭실대 박정신 교수의 말이다. 박교수에 따르면, 구한말 한국교회는 변혁과 개혁의 시기에 역사와 시대를 앞서서 변혁하는 공동체였다고 한다. 교회가 교육·문화·여성문제·정치문제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앞섬이'로서의 교회는 해방 직후 권위주의 시대, 군사독재시대를 지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작금의 한국교회는 오히려 모든 면에서 사회보다 뒤쳐져 있는 ‘뒷섬이’가 되었다고 탄식했다. 작년 한 해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굳이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교회에 대한 대사회적 이미지는 냉소적 시선을 넘어서 혐오의 수준에 가까웠다.

 

그러한 혐오 증상은 2008년이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고착되는 듯하다. 왜일까? 교계의 원로이신 옥한흠 목사가 '한국교회가 세속화되었다'고 했으며, 조용기 목사는 '귀족화되었다'고 진단하였다. 세속화와 귀족화. 그렇다. 한국교회는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 현상이며 한국교회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회가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이 시점에, 교회가 왜 세속화되고 귀족화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개혁은 상황과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맘모니즘 : 2단 vs 4단

 

 얼마 전 중년의 집사님으로부터 상담 전화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딸이 취업을 준비하는데, 직장 상사로부터 D교회를 출석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D교회는 10년 전 메이저교단들로부터 이단판정을 받은 교회다. 딸의 앞길을 생각하면 직장 상사의 권유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에 보내기도 찜찜했던 것이다.

 

D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신앙적 문제에 대해 한참 동안 설명했다. 상담을 마치려는데 마지막 질문을 건네 온다. D교회가 다시 기성교단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없는지, 그 교회의 문제들이 그리 심각한 것인지. 이 질문 앞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 현재 기성교단, 정통교단 안에서는 웬만한 이단 못지않은 이단적, 비성경적인 모습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2단(이단)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면서 4단(사탄)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제는 그 사탄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사탄의 실체는 바로 맘몬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같은 위상을 두고 비교하며 경계하셨던 바로 그 맘몬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중국에서 탈북자 사역을 했다. 그때 만났던 북한지하교회 성도의 한마디. “한국 교회를 위해 우리가 기도하고 있시오.” 한국교회가 북한의 우상화를 걱정하면서, 보이지 않게 침투해 있는 사탄의 세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우려되는 일이다.

 

"자본주의, 한국교회를 접수하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의 이 표현은 맘몬에 사로잡힌 한국교회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천박한 자본주의, 맘모니즘에 깊이 물들어 있다. 이 땅의 구석구석, 심지어는 자연과 생태계까지 이미 맘몬의 포로가 되어 있다. 오죽하면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말이 유행하겠는가. 이러한 맘모니즘의 흐름에 교회 역시 저항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개혁연대 부설 교회문제상담소(이하 상담소)는 지난 2007년 총 80여건의 교회문제를 상담하였다. 거의 대부분이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과도한 사례를 요구하는 목회자, 재정 비리에 대한 제보, 교회 재산권을 가지기 위한 분쟁 등 ‘돈’은 교회의 분쟁을 지속하는 동력이요, 부패를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인 것이다.

 

맘모니즘은 그 외면을 살짝 포장하여 목사를 유혹한다. 성장제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목회자의 목회적 야망을 자극하여 '부흥은 성령께서 주도하신다'는 명제가 '성장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흥시킨 교회', '큰 교회 목사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종'이라는 명제로 왜곡되었다. 그렇기에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성장의 과정을 하나님이 보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당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심지어 그것이 말씀에 대한 왜곡이라 할지라도. 돈을 벌고 싶은 성도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축복을 남발한다.

 

경상대 백종국 교수는 1990년대 이후의 한국은 천민자본주의가 전개되고 있었고 한국교회 역시 천민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 내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교회의 성장제일주의로 드러나고 있으며, 성공(성장)하면 그가 저지른 모든 행위들이 정당화되는 풍토가 만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형마트가 지점을 내듯 지교회를 세우고, 백화점에서조차 금지한 셔틀버스로 성도들을 쓸어 모으고, 이것이 '능력'으로 평가 받는 풍토. 바로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어찌 귀족화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귀족화는 당연한 귀결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대교회를 부러워한다. 안타까운 것은 적지 않은 신학생들의 비전이 대교회 담임목사라는 현실이다.

 

기복주의 : 능력의 종을 요구하다

 

맘몬은 성도들의 기복적 정서를 자극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슬쩍 꿰차고 앉는다. 우리 인생의 구주시고 주인이신 하나님보다는 '나로 하여금 부자 되게 하는' 새로 창조된 하나님만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자도,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 가치보다는, 돈 많이 벌고 복 받는 메시지가 성도에게 환영받는다. 기복주의. 이것은 한국교회의 신앙적 본질을 흐려놓는 주범이다. 종교사회학적으로 볼 때, 한국인의 종교적 밑바탕에는 무속신앙이 있다고 한다. 불교와 유교가 한국에 유입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불교와 유교의 본래의 모습을 잃고 샤먼적 종교가 되어 버렸다.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는 이러한 한국의 의식사상을 ‘비빔밥 철학’이라고 했다. 무속신앙이 혼재된 한국적 불교, 한국적 유교. 그리고 기독교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 A목사에 관한 제보가 접수됐다. 은퇴를 앞둔 A목사는 부흥사다. 지난 수십 년 간 본 교회 정규 예배 외에 타 교회 교인을 대상으로 목요부흥집회와 토요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그런데 최근 그가 네 명의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교회가 시끄러워졌다. 알고 보니 그간 A목사는 목요집회와 토요집회에서 걷어진 헌금을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라는 명목으로 가져갔으며, 교회 재정 횡령에 관한 의혹까지 있었다.

 

메시지는 어땠을까?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로 흰 옷을 입고 나오면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겠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하고, "지난주에 죽은 성도의 영혼이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고 있다"는 등의 설교를 수시로 하는 그야말로 사이비적이고 저속한 설교를 일삼아왔다. 결국 A목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근처 자택에서 다시 부흥집회를 시작했다. 어땠을까? 놀라운 것은 수십 명의 성도들이 그 목사를 따라가 함께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간 A목사가 성도들에게 있어 무당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무속적인 종교에 있어서 종교인의 역할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역할이다. 그의 삶이 모범적이지 않아도 되고 도덕적일 필요도 없다. 그저 신과의 매개 역할만 잘하면 그만이다. 신령한 목사를 요구하는 성도들의 심리가 여기에 있다. 부흥집회를 홍보하며 '40일 금식 몇 회' 하며 내세우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회개를 요구하고 죄를 지적하는 목사는 불편하다. 목사의 도덕성이나 윤리성도 중요하지 않다. 기적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홍보하고, 강한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압도하는 그런 목회자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능력과 카리스마로 결국 성도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사들의 능력으로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지고, 사업이 잘 되기를 기대한다. 능력의 종! 기복주의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목회자 아닌가? 이로 인해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민주적 구조 : 목사를 유혹하다

 

교회의 부패나 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목회자 개인이나 소수의 장로에게 너무나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과도한 권력은 부패한다. 인간은 죄인이다. 이것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다. 목사도 장로도 언제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존재이다. 방송에 보도된 B교회의 경우, 목회자가 교인 중 누구도 모르게 교회 건물을 담보로 수억 원을 대출 받아 땅을 샀다. 1년이 지나도 땅 값이 오르지 않자 다시 그 땅을 교회가 사도록 했다. 교회를 찾아가 장로들에게 물으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목사 혼자서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수십 년간의 관례라고 했다.

 

과연 이런 구조에서 건강한 목회자, 건강한 교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문제를 잠재시켜 놓은 채 가고 있는 것이다. 비단 재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운영과 의사 결정에 있어서 소수에게 주어진 절대 권한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비민주적 구조는 맘몬의 횡포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상담소에 접수되는 대다수의 사례는 이런 구조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교회의 비민주적 의결구조는 분쟁 해결에도 큰 걸림돌이 되어서, 수년간 교인들 간의 법정 소송을 유발하여 사회로부터의 비난을 더하게 한다.

 

한국교회의 희망 찾기

 

이쯤 되면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과연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인을 남겨두셨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우리의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다만, 우리의 죄악과 문제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비록 아프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한국교회의 희망을 이야기해보자.

 

첫째,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선포할 때 교회는 개혁될 것이다. 신앙의 변질과 교회의 부패는 왜곡된 성경해석으로 포장되고 정당화된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병폐를 근원적으로 치료해가려면 성도들의 눈이 환히 열리도록 올바른 성경해석을 정립해야 한다.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 늘 새롭게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며 기꺼이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건강한 중소형 교회의 확산과 그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교회의 개혁을 기대할 수 있다. 성장제일주의와 개교회주의 아래서 한국교회의 개혁은 요원한 일이다. 성장제일주의의 청산은 교회의 세속화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게 할 것이다. 개교회주의를 버림으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작은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는 서로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며, 연대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일구어 냄으로써 교회의 보편성과 일체성을 회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내부의 민주적 절차 확보를 위한 정관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건강한 교회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와 권한 분배를 통해 현재 발생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를 상당히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개판 치는 목사가 왜 이리 많은가’라는 고은 광순 씨의 칼럼이 인터넷을 타고 확산되고 있다. 마치 해일처럼. 그 앞에 "세상에는 이런 교회도 있다"는 이의용 교수의 칭찬이 무색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본다. 한국교회가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그날에 온 국민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할 그 날을 위해 기도한다.

 

2008년. IVP <소리> 4월호.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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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섬 하나

 

서울에서 먼 지역에 사는 A교회 B집사와 수개월간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A교회 목사님은 지역사회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 연 1억 원 정도의 재정 중 70% 정도가 목회자에게 지급된 것이다. 사례비, 상여금, 학비 보조금, 대화 활동비, 사택 관리비, 동창회비, 자녀 교육비, 자녀 사교육비, 자녀 급식비 등등.

 

그 해 재정 감사로서 장부를 들여다 본 B집사는 크게 놀랐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후 개혁연대와의 상담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대안을 제시하고, 담임 목사와 성도들을 설득하였다. 고액의 연봉에도 불구하고 목회마저 불성실했던 담임목사는 결국 여론에 밀려 공개 사과를 했고, 다음 해 예산은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 실정과 교인들 정서에 맞게 조정하고, 적게나마 이전에 없던 구제비와 선교비 등도 책정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궁지에 몰린 담임 목사가 몇 달 전 갑자기 '신유 집회'를 열었다. 유명한 신유 강사를 초청한 이 집회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쓰러졌다. 금가루가 떨어지고, 방언이 터지고, 쓰러지고, 춤추고…. 이 집회는 교인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었고, 담임 목사는 그 이후로 매일 저녁 신유 기도회를 열어, 그 유명한 강사도 하지 못했던 '엽기적'인 형태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B집사는 다시 고민했다.

 

금가루 현상, 빈야드, 알파코스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상담한 결과 이것이 건강한 사역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료를 제시하며 목사와 성도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성이나 (건전한)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던 그들이 오히려 B집사에게 ‘믿음 없는 사람', '교회를 흔드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B집사는 교회 안에서 고립되어 가고 있다.

 

 

외로운 섬 둘

 

C교회는 몇 년 전 매우 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교인수가 200명 남짓인데 비해 수십 억 빚을 내서 건축한 것이다. 예배당 건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기실 C교회 역사는 건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하고 살만하면 증축하고, 이젠 됐다 싶으면 또 다시 건축 하고, 증축하고, 이전하고, 고치고…. 계속해서 무리하게 헌금을 강요했고 교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매달 들어오는 헌금은 대부분 이자로 축나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 목사는 자신의 사례비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대외지출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보다 못한 교인 10여 명이 목사님께 재정과 교회 운영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였다. 그때부터 담임목사는 강단에서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사탄·마귀·아간·고라 등 할 수 있는 한 모든 비유를 통해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을 저주하였다. 매 설교마다 자신들을 향해 퍼붓는 저주를 듣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수준 낮은 설교였다. 신학적 수준은 둘째 치고라도, 문법적으로도 제대로 맞지 않는 저급 설교를 듣는 것은 고통 중에 고통이었다. 이들이 듣기에 그것을 '설교'도 아니었다.

 

그러면 C교회 다른 성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설교의 수준은 저질이요, 누구든 매 예배마다 저주를 퍼붓고, 목양에는 관심 없이 그저 헌금만 내라고 강요하는 목사.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회를 떠나거나, 성도 10여 명과 힘을 합하여 교회 갱신을 위해 힘쓰거나, 최소한 이들을 위로해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다른 성도들이 보인 반응은 이 성도 10여 명을 '왕따'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전화로 위로하는 성도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성도들은 목사에게 저주를 받을까 무서워 이들과 대화조차 꺼렸다고 한다. 이들이 식당에서 밥이라도 먹으려 하면,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이들이 식사하는 주변 1m 이내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 마치 섬이 하나 생긴 모양새였다고 한다.

 

개혁을 외치던 이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섬이 되었다. 

 

 

제직회 발언 한 번에 왕따 당하는 교회, 눈 먼 자들의 교회

 

필자가 글을 쓰던 도중 위의 사례를 읽은 아내가 묻는다.

"이거 당신이 사역하던 D교회 얘기네."

글을 다시 읽어보니 그간 상담했던 100개가 넘는 교회들 중 A교회나 C교회로 의심되는 교회가 한둘이 아니다. 어쩌면 이리 닮았을까. 하는 짓(많이 자제한 표현이다)도 그렇고, 대응하는 방법도 그렇고. 무엇보다 확실히 닮아 있는 건 그들이 교회 내 개혁 세력을 철저히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지극히 성경적이고, 신앙적이며,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데도 교회에서 개혁을 외치면 왕따를 당한다.

 

이런 전화를 자주 받는다.

"00 지역에 개혁연대 회원 모임이 없습니까?"

왜 그런가 물으니 '외롭다'고 한다.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을 한다거나, 공개적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외롭단다. 성경적 정체성을 상실한 채 바알을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 현실에서 바른 신앙을 고수한다는 건 외로운 일이며, 스스로 고립시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봤던 영화 가 생각난다. 모든 사람이 눈 먼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을 뜬 여인에게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눈 먼 자들은 자기 스스로 보지 못하기에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갖 추한 짓들을 해댄다. 눈을 뜬 사람에게는 그 '추한 짓'이 고스란히 보인다. 제직회에서 바른 소리 한 번 했다고, 당회에 바른 소리 한 번 했다고 왕따를 시키는 교회, 이 어찌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겠는가.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뜨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외로움이다.

 

 

섬(島)들의 네트워크

 

신앙적으로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한 개인만이 아닐 것이다. 개혁연대를 비롯한 개혁 단체들 역시 한국 교회라는 큰 바다 안에 고립된 외로운 섬이다. 그렇다면 이 외로움은 그저 혼자서 '외롭게'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로운 싸움에 지쳐 괴로워하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동지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칠천 명이나 되는 동지가 있다는 소식은 좌절하여 주저앉은 선지자를 일어서게 했다. 지금 한국 교회 안에도 엘리야와 같이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 외롭게 기도하는 이들이 힘을 얻는 것은, 맘몬 앞에 무릎을 꼿꼿이 세우고 버티는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몇 해 전, 성남 지역에 모여 있는 회원들 모임에서 강의하고 함께 기도했다. 필자의 강의나 그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위로와 힘이 됐던 것은 인근 지역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동지들이 있다'라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성남 모임은 수원 모임을 만나고 싶어 했다. 수원 모임도 성남 모임을 만나고 싶어 했다.

 

마치 엘리야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동지인 엘리사를 만났던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만나고 싶어 했다. 고립된 섬들의 연대는 외로움을 덜어낼 뿐만 아니라 개혁의 동력을 더 끌어 올릴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만남 이후 다시 활발해진 엘리야의 활동을 생각해 보시라. 각 지역의 섬들은 이제 '동지가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현하는 그 길을  함께 가기 원한다.

 

 

칠천인 찾기 프로젝트, "혼자가 아니야!"

  

 개혁연대는 회원들의 요구와 필요에 공감하여 2009년 전국투어를 통해 맘몬에게 무릎 꿇지 않은 그 '칠천인'을 찾아가 만나기로 했다. 첫 방문으로 지난 3월 10일 수원 지역을 방문하였다. 역시 그들은 외로워하고 있었다.

 

지난 4년간 소수 인원이 모임을 유지해오며 독서 토론회, 기도회, 세미나, 말씀 사경회, 성경 강좌 등 사업을 해왔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여전히 '소수'이며 각자의 지역 교회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위축되고 외로워했다. 서울에서 외롭게 몸부림치는 소수가 찾아가 그들을 만났다. 섬(島)과 섬(島)의 만남이었다. 우리는 만나서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먹고, 실컷 웃고, 목 놓아 기도했다. 만남은 즐거웠고,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비록 소수이지만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전국의 외로운 섬들을 찾아가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해줄 것이다. 맘몬에게 무릎을 꼿꼿이 세워 버티고 있는 개혁의 동지들이 서로 만나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 것이다. 프로그램도, 세미나도, 포럼도, 잠시 접어두고 서로 만나서 놀고, 웃으며 쉼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가는 그 길,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면 되는 것이고 긴 여정에 아픈 다리는 서로 기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젠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마시라. 이제 우리는 홀로 고립된 섬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로 가는 항해에서 서로에게 정박할 수 있는 쉼터가 될 것이며, 각 지역에서 숨겨진 하나님 뜻을 발견하게 하는 부표(浮漂)가 될 것이다.

 

2009년 3월 10일.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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