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초기 한국교회는 사회의 '앞섬이'였다."

 

숭실대 박정신 교수의 말이다. 박교수에 따르면, 구한말 한국교회는 변혁과 개혁의 시기에 역사와 시대를 앞서서 변혁하는 공동체였다고 한다. 교회가 교육·문화·여성문제·정치문제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앞섬이'로서의 교회는 해방 직후 권위주의 시대, 군사독재시대를 지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작금의 한국교회는 오히려 모든 면에서 사회보다 뒤쳐져 있는 ‘뒷섬이’가 되었다고 탄식했다. 작년 한 해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굳이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교회에 대한 대사회적 이미지는 냉소적 시선을 넘어서 혐오의 수준에 가까웠다.

 

그러한 혐오 증상은 2008년이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고착되는 듯하다. 왜일까? 교계의 원로이신 옥한흠 목사가 '한국교회가 세속화되었다'고 했으며, 조용기 목사는 '귀족화되었다'고 진단하였다. 세속화와 귀족화. 그렇다. 한국교회는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 현상이며 한국교회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회가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이 시점에, 교회가 왜 세속화되고 귀족화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개혁은 상황과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맘모니즘 : 2단 vs 4단

 

 얼마 전 중년의 집사님으로부터 상담 전화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딸이 취업을 준비하는데, 직장 상사로부터 D교회를 출석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D교회는 10년 전 메이저교단들로부터 이단판정을 받은 교회다. 딸의 앞길을 생각하면 직장 상사의 권유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에 보내기도 찜찜했던 것이다.

 

D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신앙적 문제에 대해 한참 동안 설명했다. 상담을 마치려는데 마지막 질문을 건네 온다. D교회가 다시 기성교단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없는지, 그 교회의 문제들이 그리 심각한 것인지. 이 질문 앞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 현재 기성교단, 정통교단 안에서는 웬만한 이단 못지않은 이단적, 비성경적인 모습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2단(이단)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면서 4단(사탄)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제는 그 사탄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사탄의 실체는 바로 맘몬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같은 위상을 두고 비교하며 경계하셨던 바로 그 맘몬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중국에서 탈북자 사역을 했다. 그때 만났던 북한지하교회 성도의 한마디. “한국 교회를 위해 우리가 기도하고 있시오.” 한국교회가 북한의 우상화를 걱정하면서, 보이지 않게 침투해 있는 사탄의 세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우려되는 일이다.

 

"자본주의, 한국교회를 접수하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의 이 표현은 맘몬에 사로잡힌 한국교회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천박한 자본주의, 맘모니즘에 깊이 물들어 있다. 이 땅의 구석구석, 심지어는 자연과 생태계까지 이미 맘몬의 포로가 되어 있다. 오죽하면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말이 유행하겠는가. 이러한 맘모니즘의 흐름에 교회 역시 저항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개혁연대 부설 교회문제상담소(이하 상담소)는 지난 2007년 총 80여건의 교회문제를 상담하였다. 거의 대부분이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과도한 사례를 요구하는 목회자, 재정 비리에 대한 제보, 교회 재산권을 가지기 위한 분쟁 등 ‘돈’은 교회의 분쟁을 지속하는 동력이요, 부패를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인 것이다.

 

맘모니즘은 그 외면을 살짝 포장하여 목사를 유혹한다. 성장제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목회자의 목회적 야망을 자극하여 '부흥은 성령께서 주도하신다'는 명제가 '성장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흥시킨 교회', '큰 교회 목사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종'이라는 명제로 왜곡되었다. 그렇기에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성장의 과정을 하나님이 보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당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심지어 그것이 말씀에 대한 왜곡이라 할지라도. 돈을 벌고 싶은 성도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축복을 남발한다.

 

경상대 백종국 교수는 1990년대 이후의 한국은 천민자본주의가 전개되고 있었고 한국교회 역시 천민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 내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교회의 성장제일주의로 드러나고 있으며, 성공(성장)하면 그가 저지른 모든 행위들이 정당화되는 풍토가 만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형마트가 지점을 내듯 지교회를 세우고, 백화점에서조차 금지한 셔틀버스로 성도들을 쓸어 모으고, 이것이 '능력'으로 평가 받는 풍토. 바로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어찌 귀족화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귀족화는 당연한 귀결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대교회를 부러워한다. 안타까운 것은 적지 않은 신학생들의 비전이 대교회 담임목사라는 현실이다.

 

기복주의 : 능력의 종을 요구하다

 

맘몬은 성도들의 기복적 정서를 자극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슬쩍 꿰차고 앉는다. 우리 인생의 구주시고 주인이신 하나님보다는 '나로 하여금 부자 되게 하는' 새로 창조된 하나님만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자도,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 가치보다는, 돈 많이 벌고 복 받는 메시지가 성도에게 환영받는다. 기복주의. 이것은 한국교회의 신앙적 본질을 흐려놓는 주범이다. 종교사회학적으로 볼 때, 한국인의 종교적 밑바탕에는 무속신앙이 있다고 한다. 불교와 유교가 한국에 유입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불교와 유교의 본래의 모습을 잃고 샤먼적 종교가 되어 버렸다.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는 이러한 한국의 의식사상을 ‘비빔밥 철학’이라고 했다. 무속신앙이 혼재된 한국적 불교, 한국적 유교. 그리고 기독교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 A목사에 관한 제보가 접수됐다. 은퇴를 앞둔 A목사는 부흥사다. 지난 수십 년 간 본 교회 정규 예배 외에 타 교회 교인을 대상으로 목요부흥집회와 토요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그런데 최근 그가 네 명의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교회가 시끄러워졌다. 알고 보니 그간 A목사는 목요집회와 토요집회에서 걷어진 헌금을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라는 명목으로 가져갔으며, 교회 재정 횡령에 관한 의혹까지 있었다.

 

메시지는 어땠을까?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로 흰 옷을 입고 나오면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겠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하고, "지난주에 죽은 성도의 영혼이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고 있다"는 등의 설교를 수시로 하는 그야말로 사이비적이고 저속한 설교를 일삼아왔다. 결국 A목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근처 자택에서 다시 부흥집회를 시작했다. 어땠을까? 놀라운 것은 수십 명의 성도들이 그 목사를 따라가 함께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간 A목사가 성도들에게 있어 무당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무속적인 종교에 있어서 종교인의 역할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역할이다. 그의 삶이 모범적이지 않아도 되고 도덕적일 필요도 없다. 그저 신과의 매개 역할만 잘하면 그만이다. 신령한 목사를 요구하는 성도들의 심리가 여기에 있다. 부흥집회를 홍보하며 '40일 금식 몇 회' 하며 내세우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회개를 요구하고 죄를 지적하는 목사는 불편하다. 목사의 도덕성이나 윤리성도 중요하지 않다. 기적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홍보하고, 강한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압도하는 그런 목회자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능력과 카리스마로 결국 성도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사들의 능력으로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지고, 사업이 잘 되기를 기대한다. 능력의 종! 기복주의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목회자 아닌가? 이로 인해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민주적 구조 : 목사를 유혹하다

 

교회의 부패나 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목회자 개인이나 소수의 장로에게 너무나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과도한 권력은 부패한다. 인간은 죄인이다. 이것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다. 목사도 장로도 언제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존재이다. 방송에 보도된 B교회의 경우, 목회자가 교인 중 누구도 모르게 교회 건물을 담보로 수억 원을 대출 받아 땅을 샀다. 1년이 지나도 땅 값이 오르지 않자 다시 그 땅을 교회가 사도록 했다. 교회를 찾아가 장로들에게 물으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목사 혼자서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수십 년간의 관례라고 했다.

 

과연 이런 구조에서 건강한 목회자, 건강한 교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문제를 잠재시켜 놓은 채 가고 있는 것이다. 비단 재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운영과 의사 결정에 있어서 소수에게 주어진 절대 권한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비민주적 구조는 맘몬의 횡포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상담소에 접수되는 대다수의 사례는 이런 구조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교회의 비민주적 의결구조는 분쟁 해결에도 큰 걸림돌이 되어서, 수년간 교인들 간의 법정 소송을 유발하여 사회로부터의 비난을 더하게 한다.

 

한국교회의 희망 찾기

 

이쯤 되면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과연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인을 남겨두셨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우리의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다만, 우리의 죄악과 문제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비록 아프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한국교회의 희망을 이야기해보자.

 

첫째,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선포할 때 교회는 개혁될 것이다. 신앙의 변질과 교회의 부패는 왜곡된 성경해석으로 포장되고 정당화된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병폐를 근원적으로 치료해가려면 성도들의 눈이 환히 열리도록 올바른 성경해석을 정립해야 한다.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 늘 새롭게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며 기꺼이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건강한 중소형 교회의 확산과 그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교회의 개혁을 기대할 수 있다. 성장제일주의와 개교회주의 아래서 한국교회의 개혁은 요원한 일이다. 성장제일주의의 청산은 교회의 세속화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게 할 것이다. 개교회주의를 버림으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작은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는 서로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며, 연대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일구어 냄으로써 교회의 보편성과 일체성을 회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내부의 민주적 절차 확보를 위한 정관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건강한 교회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와 권한 분배를 통해 현재 발생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를 상당히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개판 치는 목사가 왜 이리 많은가’라는 고은 광순 씨의 칼럼이 인터넷을 타고 확산되고 있다. 마치 해일처럼. 그 앞에 "세상에는 이런 교회도 있다"는 이의용 교수의 칭찬이 무색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본다. 한국교회가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그날에 온 국민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할 그 날을 위해 기도한다.

 

2008년. IVP <소리> 4월호.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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