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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27 通하지 않으면 痛한다.

필자가 지난해까지 3년간 사무국장으로 활동한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인들을 상담하며 얻은 결론이 있다. 교인들의 과도한 섬김은 목사를 변질시키며, 목사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한은 목사를 부패하게 할 뿐 아니라 교회를 병들게 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교회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민주적 교회를 만들어서 목사가 설교와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목사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엡 2:20~22)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전문 지식과 통찰력이 반영됨으로써 목회의 효율도 극대화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적 교회를 만드는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목사가 가지고 있던 권한을 나눠 주는 일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교회 내에 민주적 소통을 이뤄 내는 과정도 말처럼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교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이 글에서 평신도들이 교회의 주체로 서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민주적 교회를 만들기 위해 목사와 성도들이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 것인지, 민주적 교회는 어떤 모양일지, 어떻게 권한을 나눠 줄 것인지에 대한 도움을 얻게 되길 기대한다.

 

문제 발생은 목사와 성도 간의 단절에서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강단에서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우리 교회 참 좋은 교회입니다." 내용인즉슨, 성도들끼리 다투지 않아 평안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점심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간접적 표현으로) 본인 설교는 늘 은혜 충만하고….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교인들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인 중 대다수는 오히려 목사의 설교 때문에 더 깊은 갈증을 느꼈고, 교회 생활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담임목사는 진심으로 자신이 말한 대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목사와 성도들이 체감하는 교회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이토록 괴리가 심할 수 있을까.

 

그 교회에 다니는 성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소위 '인(人)의 장막'에 갇힌 목사와 성도들 간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목사 자신이 귀에 달콤한 말만을 전하는 측근(?)에 둘러싸여 교회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목사와 성도들 간의 이러한 '소통 두절'은 필자가 그 이후 경험했던 교회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담임목사나 소수의 장로에 의해서 독재적으로 목회(운영)되고 있는 교회들의 공통적 현상 중 하나는 바로 '소통의 단절'이다. 독재적 지도자 옆에는 항상 간신배가 있기 마련이다. 교인들의 요구나 정서와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피드백만을 전하는 무리들 말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무한 긍정의 견해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착각에 빠지게 하고, 소위 말하는 '자뻑(?)의 감옥'에 갇히게 한다는 것이다.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한다'는 이의용 교수의 말대로 많은 교회들이 소통의 불통으로 인해 아파하고 있다.

 

서울 홍제동 S교회 역시 '소통'이 '불통'되는 교회였다.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할 제직회는 늘 요식적인 진행으로 불통을 확인하는 현장이었다. 모임 시간도 예배를 마치고 식사하기 전이다 보니, 심도 있는 토론을 하기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고, 당연히 제직들의 참여가 저조했다.

 

이 교회는 최근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신도사역협의회'를 만들었다. 평신도사역협의회의 구성원은 제직회의 부장·차장과 자치회(남선교회·여전도회·청년회·학생회)의 회장·총무, 보직이 없는 항존직들이다. 이 자리에는 목사도 1/n로 참여한다. 모임은 분기마다 1회로 하고, 충분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교회의 주요 사역을 모두 마친 주일 늦은 오후에 모인다.

 

둥그렇게 둘러앉는 좌석 배치로 진행자와 참여자의 차별을 최소화하였다고 한다. 이 모임은 연령이나 직분에 차등 없는 발언권으로 수평적인 논의 구조가 정착되었다. 최근에는 제직회보다 더 많은 숫자가 참여하고 있으며, 제직회에서는 잘 발언하지 않던 여자 집사들의 참여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슈들을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김장하기, 주차장 포장, 에어컨 보수 등)

 

의사 결정 권한은 없으나 간담회 형태로 충분한 협의를 거쳐 민의와 여론을 당회와 담임목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해 성도들은 교회의 사역이 목회자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성도와 목사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고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공동 목회

 

1986년 개척한 새민족교회(예장통합·목사 김영철)는 1999년 말, 새로운 세기에 걸맞은 교회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한 논의에서 두 가지 방향을 설정했다. 하나는 교회가 지역 사회를 향한 문화적 기능을 감당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의 깃발을 다시 일으켜 평신도 운동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이다. 논의 끝에 평신도 중심의 기획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위원회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운영위원회라는 이름을 거쳐 2003년 '교회위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위원회는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교회 운영의 중심 기구로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공동 목회를 하는 틀이다. 위원은 선출직 직분자 3명(장로 1명, 권사와 안수집사 중 2명), 등대(다른 교회의 목장, 혹은 구역) 대표 3명, 교사 대표 1명, 담임목사, 젊은이교회 1청년 대표 등 9명으로 구성한다. 이들은 교인 총회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2년으로 한다. 단, 1년 이상 휴무한 뒤에는 다시 선출될 수 있다. 특별히 교회위원회 위원장은 목사가 아닌 평신도 제직 중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새민족교회의 규약은 교회위원회가 교회 운영에서 기본 운영 방침, 사업 계획 수립, 재정 운영 계획, 인사, 선거 관리, 목회자 청빙, 교회 전 기관과 부서에 대한 감독, 교인 총회에서 위임한 사항, 기타 다른 기관이 담당하지 않는 업무를 관할하는 심의 의결 기구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당회와의 관계다. 교회위원회의 직무가 보통의 장로교단 교회의 당회가 하는 직무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든 민주적 운영을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될 때, 기존 교회 구조의 당회 직무와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게 된다. 새민족교회의 경우는 당회의 의사 결정 기능을 배제시켰다. '장로'에게는 말 그대로 교회의 어른으로서 교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임으로 교우들의 신앙을 살피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리고 장로교단에 소속된 교회로서 불가피하게 관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회(노회, 총회)와의 법적 역할을 수행하게 해서 불필요한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평신도와 목회자가 공동으로 목회하는 민주적 운영 구조를 만들기 위해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노력해 온 새민족교회는 2010년 현재 제8기 교회위원회가 활동을 하고 있다.

 

평신도 사역의 주체가 되기까지

 

매년 초, '이런 교회 다니고 싶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있는 예인교회(독립교단·목사 정성규)도 평신도 중심으로 사역하는 대표적 교회다. 예인교회의 경우 운영위원회가 새민족교회의 교회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11월 개척한 예인교회는 설립 과정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의 교회가 담임목사를 포함한 극소수의 교인들이 건물부터 임대해 놓고 사람을 채워 가는 형태인 반면, 예인교회는 50~60명의 '사람'들이 모여 시작하였다. 교인 중 대다수가 이전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전횡으로 인한 상처를 가진 분들이었기에,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운영은 민주적으로, 소유는 최소한, 나눔은 최대한'이란 모토를 전면에 내세웠다. 시작은 그럴 듯했으나, 민주적 운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교인들은 그동안 신앙 여정이 수동적이고 의존적이었기에 교회 일을 주체적으로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호소를 했다. 심지어 운영위원회에서 '주일 날 김밥을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결정조차도 자신들이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담임목사에게 결정을 부탁하였다. 과거 교회에서 '성직 vs. 세속'이라는 극단적 이원론에 세뇌되어,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상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담임목사나 평신도 모두를 당황케 했다. 정성규 담임목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에게 부여되고 있는 권한을 장기간에 걸쳐 이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은 '신앙 용어 바로 알기'라는 성경 공부 과정을 통해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여, 성도들의 잠자는 의식을 깨워 나갔다. 이와 병행하여 자신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지만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고, 발언조차도 최소화하며 모든 결정권을 성도들에게 맡기고 기다렸다. 정 목사의 이런 태도는 진행되는 일을 더디게 하였고, 이로 인해 성도들은 큰 부담을 느꼈다. 그야말로 '비효율적'이었다.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 목사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최근에야 결과를 보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개척 10주년을 맞는 올해 비로소 정 목사는 모든 행정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목사의 주인 의식, 평신도의 주인 의식

 

주의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은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이에겐 당연하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는 결단이, 어떤 이에겐 군중 속에 숨어 안주하고 싶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아픔이 요구되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건강한 교회 만들기의 모범 답안이 될 수 없으며 특별한 장치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교인과 교인, 목사와 평신도 간의 건전한 소통을 위한 진실한 노력이 건강한 교회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또한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질 뿐 아니라 자신의 짐(때로는 '짐'이 '기득권'일 수도 있겠지만)을 서로에게 믿고 이양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대다수 교회의 문제는 목사의 과도한 주인 의식에서 비롯한다. 건전한 애정의 발로로서의 주인 의식이 아니라 과도한 소유욕에서 비롯한 독재적 성향이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다. 이는 당연히 교회의 건강성을 해칠 수밖에 없다. 평신도가 교회 운영에 대해서 순종과 은혜의 원리를 내세워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 역시 같은 문제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서는 그 권한을 또한 당신의 백성에게 위임하셨다. 목사는 '성도'에게 위임된 그 권한을 왜곡된 신학을 내세워 독점할 것이 아니라 평신도와 함께 진리와 사랑으로 공유해야 할 것이다. 또한 평신도들은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감당해야 할 소명이 있다.

 

평신도들이여, 교회의 머리는 당신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며 당신은 그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일무이한 '지체'임을 스스로 일깨우기 바란다. 그러할 때 그분의 몸은 더 이상 독재와 부패로 신음하지 않고 건강과 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복음과상황>2010년 3월호.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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