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섬 하나

 

서울에서 먼 지역에 사는 A교회 B집사와 수개월간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A교회 목사님은 지역사회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 연 1억 원 정도의 재정 중 70% 정도가 목회자에게 지급된 것이다. 사례비, 상여금, 학비 보조금, 대화 활동비, 사택 관리비, 동창회비, 자녀 교육비, 자녀 사교육비, 자녀 급식비 등등.

 

그 해 재정 감사로서 장부를 들여다 본 B집사는 크게 놀랐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후 개혁연대와의 상담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대안을 제시하고, 담임 목사와 성도들을 설득하였다. 고액의 연봉에도 불구하고 목회마저 불성실했던 담임목사는 결국 여론에 밀려 공개 사과를 했고, 다음 해 예산은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 실정과 교인들 정서에 맞게 조정하고, 적게나마 이전에 없던 구제비와 선교비 등도 책정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궁지에 몰린 담임 목사가 몇 달 전 갑자기 '신유 집회'를 열었다. 유명한 신유 강사를 초청한 이 집회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쓰러졌다. 금가루가 떨어지고, 방언이 터지고, 쓰러지고, 춤추고…. 이 집회는 교인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었고, 담임 목사는 그 이후로 매일 저녁 신유 기도회를 열어, 그 유명한 강사도 하지 못했던 '엽기적'인 형태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B집사는 다시 고민했다.

 

금가루 현상, 빈야드, 알파코스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상담한 결과 이것이 건강한 사역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료를 제시하며 목사와 성도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성이나 (건전한)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던 그들이 오히려 B집사에게 ‘믿음 없는 사람', '교회를 흔드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B집사는 교회 안에서 고립되어 가고 있다.

 

 

외로운 섬 둘

 

C교회는 몇 년 전 매우 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교인수가 200명 남짓인데 비해 수십 억 빚을 내서 건축한 것이다. 예배당 건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기실 C교회 역사는 건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하고 살만하면 증축하고, 이젠 됐다 싶으면 또 다시 건축 하고, 증축하고, 이전하고, 고치고…. 계속해서 무리하게 헌금을 강요했고 교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매달 들어오는 헌금은 대부분 이자로 축나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 목사는 자신의 사례비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대외지출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보다 못한 교인 10여 명이 목사님께 재정과 교회 운영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였다. 그때부터 담임목사는 강단에서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사탄·마귀·아간·고라 등 할 수 있는 한 모든 비유를 통해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을 저주하였다. 매 설교마다 자신들을 향해 퍼붓는 저주를 듣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수준 낮은 설교였다. 신학적 수준은 둘째 치고라도, 문법적으로도 제대로 맞지 않는 저급 설교를 듣는 것은 고통 중에 고통이었다. 이들이 듣기에 그것을 '설교'도 아니었다.

 

그러면 C교회 다른 성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설교의 수준은 저질이요, 누구든 매 예배마다 저주를 퍼붓고, 목양에는 관심 없이 그저 헌금만 내라고 강요하는 목사.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회를 떠나거나, 성도 10여 명과 힘을 합하여 교회 갱신을 위해 힘쓰거나, 최소한 이들을 위로해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다른 성도들이 보인 반응은 이 성도 10여 명을 '왕따'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전화로 위로하는 성도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성도들은 목사에게 저주를 받을까 무서워 이들과 대화조차 꺼렸다고 한다. 이들이 식당에서 밥이라도 먹으려 하면,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이들이 식사하는 주변 1m 이내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 마치 섬이 하나 생긴 모양새였다고 한다.

 

개혁을 외치던 이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섬이 되었다. 

 

 

제직회 발언 한 번에 왕따 당하는 교회, 눈 먼 자들의 교회

 

필자가 글을 쓰던 도중 위의 사례를 읽은 아내가 묻는다.

"이거 당신이 사역하던 D교회 얘기네."

글을 다시 읽어보니 그간 상담했던 100개가 넘는 교회들 중 A교회나 C교회로 의심되는 교회가 한둘이 아니다. 어쩌면 이리 닮았을까. 하는 짓(많이 자제한 표현이다)도 그렇고, 대응하는 방법도 그렇고. 무엇보다 확실히 닮아 있는 건 그들이 교회 내 개혁 세력을 철저히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지극히 성경적이고, 신앙적이며,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데도 교회에서 개혁을 외치면 왕따를 당한다.

 

이런 전화를 자주 받는다.

"00 지역에 개혁연대 회원 모임이 없습니까?"

왜 그런가 물으니 '외롭다'고 한다.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을 한다거나, 공개적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외롭단다. 성경적 정체성을 상실한 채 바알을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 현실에서 바른 신앙을 고수한다는 건 외로운 일이며, 스스로 고립시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봤던 영화 가 생각난다. 모든 사람이 눈 먼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을 뜬 여인에게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눈 먼 자들은 자기 스스로 보지 못하기에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갖 추한 짓들을 해댄다. 눈을 뜬 사람에게는 그 '추한 짓'이 고스란히 보인다. 제직회에서 바른 소리 한 번 했다고, 당회에 바른 소리 한 번 했다고 왕따를 시키는 교회, 이 어찌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겠는가.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뜨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외로움이다.

 

 

섬(島)들의 네트워크

 

신앙적으로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한 개인만이 아닐 것이다. 개혁연대를 비롯한 개혁 단체들 역시 한국 교회라는 큰 바다 안에 고립된 외로운 섬이다. 그렇다면 이 외로움은 그저 혼자서 '외롭게'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로운 싸움에 지쳐 괴로워하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동지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칠천 명이나 되는 동지가 있다는 소식은 좌절하여 주저앉은 선지자를 일어서게 했다. 지금 한국 교회 안에도 엘리야와 같이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 외롭게 기도하는 이들이 힘을 얻는 것은, 맘몬 앞에 무릎을 꼿꼿이 세우고 버티는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몇 해 전, 성남 지역에 모여 있는 회원들 모임에서 강의하고 함께 기도했다. 필자의 강의나 그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위로와 힘이 됐던 것은 인근 지역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동지들이 있다'라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성남 모임은 수원 모임을 만나고 싶어 했다. 수원 모임도 성남 모임을 만나고 싶어 했다.

 

마치 엘리야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동지인 엘리사를 만났던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만나고 싶어 했다. 고립된 섬들의 연대는 외로움을 덜어낼 뿐만 아니라 개혁의 동력을 더 끌어 올릴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만남 이후 다시 활발해진 엘리야의 활동을 생각해 보시라. 각 지역의 섬들은 이제 '동지가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현하는 그 길을  함께 가기 원한다.

 

 

칠천인 찾기 프로젝트, "혼자가 아니야!"

  

 개혁연대는 회원들의 요구와 필요에 공감하여 2009년 전국투어를 통해 맘몬에게 무릎 꿇지 않은 그 '칠천인'을 찾아가 만나기로 했다. 첫 방문으로 지난 3월 10일 수원 지역을 방문하였다. 역시 그들은 외로워하고 있었다.

 

지난 4년간 소수 인원이 모임을 유지해오며 독서 토론회, 기도회, 세미나, 말씀 사경회, 성경 강좌 등 사업을 해왔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여전히 '소수'이며 각자의 지역 교회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위축되고 외로워했다. 서울에서 외롭게 몸부림치는 소수가 찾아가 그들을 만났다. 섬(島)과 섬(島)의 만남이었다. 우리는 만나서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먹고, 실컷 웃고, 목 놓아 기도했다. 만남은 즐거웠고,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비록 소수이지만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전국의 외로운 섬들을 찾아가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해줄 것이다. 맘몬에게 무릎을 꼿꼿이 세워 버티고 있는 개혁의 동지들이 서로 만나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 것이다. 프로그램도, 세미나도, 포럼도, 잠시 접어두고 서로 만나서 놀고, 웃으며 쉼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가는 그 길,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면 되는 것이고 긴 여정에 아픈 다리는 서로 기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젠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마시라. 이제 우리는 홀로 고립된 섬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로 가는 항해에서 서로에게 정박할 수 있는 쉼터가 될 것이며, 각 지역에서 숨겨진 하나님 뜻을 발견하게 하는 부표(浮漂)가 될 것이다.

 

2009년 3월 10일.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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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A 공동경비구역

영화 2012. 8. 27. 13:03

영원히 닫혀있을 것만 같았던 북한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북한에 대해 크게 오해했던 부분들을 하나씩 깨닫게 했고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동족애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대통령에게 건배를 청하며 너스레를 떠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보면서 약간은 어색하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 사람이었구나’ (북한군을 늑대로, 김일성을 돼지로 그린 ‘똘이장군’이란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이들은 늑대 북한군과 돼지 김일성을 생각하며 자라왔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북한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의 입을 찢는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위원장 그리고 영화 JSA는 그들이 사람(?)이란 걸 깨닫게 했습니다.). 남북한이 함께 손을 잡고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정말로 감동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통일로 가는 길은 멀고 그 길에는 수많은 돌발적인 변수가 잠재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바로 이런 우리의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영화였습니다.

 

재미와 감동에 있어서 이전에 나왔던 어떤 외국 영화와도, 그리고 흥행 대작 ‘쉬리’와의 비교도 허락치 않는 ‘공동경비구역 JSA'는 또한 우리의 상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남북한이 대치되어 있는 공동경비구역(JSA)과 비무장지대(DMZ)를 중심으로 4명의 남북한 군인들 사이의 우정과 비극적 결말을 미스터리 기법을 빌려 그린 영화입니다.

 

너무도 위험스러운 우정을 키워나가는 네 명의 남한과 북한군인들.

그들이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김정일 국방원장의 조크를 들으며 웃었던 그 흐뭇한 웃음을 터뜨렸고, 북한군 간부에게 발각되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죽이는(북한군 간부와 사병 한 명) 상황에서는 지난 8월 이산가족 1차 상봉 후 헤어질 때 쏟았던 그 눈물을 다시 한 번 쏟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통일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과 통일에 대한 ‘가능성’ 이었습니다. 영화 속의 북한군이 말한 것처럼 “오욕으로 점철된 50년 분단”은 서로에 대해 편견을 갖게 했으며, 결국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이기도 하지요.

 

둘째, 그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통일 분위기 밑에 깔려있는 ‘분단과 냉전’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게 했습니다.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을 부르는 그 화기애애함 뒤에는 여러 가지 돌발 상황이 잠재해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극단적인 접근들, 분단 50년이 만들어낸 생각의 차이와 오해의 가능성, 필요 이상으로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언론, 미국, 일본, 중국........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은 마치 북한 초소에서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나타나 비극의 상황으로 만들어버린 북한군 간부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순간 서로가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총부리를 다시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전쟁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일 겁니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결국, 이런 생각들은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고 그분을 의지하게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을 용서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2000년 가을. 한가람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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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트 어웨이  (0) 2012.08.27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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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트 어웨이

영화 2012. 8. 27. 13:01

답답한 도시를 떠나 자연이 살아있는 무인도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누구나 한 번 쯤은 가져봤을 겁니다. 길게 자란 야자수 나무, 하얀 모래사장,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 내용은 둘째 치고라도, 그런 경관을 맘껏 즐기고 싶은 분께 추천합니다. ‘Cast Away'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무인도에 표류된 사람 얘깁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1. 시간

문명 세계. Fedex 간부인 척(톰행크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시간입니다. 영화의 초반부터 유난히도 시간을 강조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그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 없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애인과 잠시 이별(그만의 착각이었지만)을 하며 다시 돌아오마고 약속하는 그의 대사가 어째 '절대 오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더군요.

 

2. 비행기 안 - 문명을 벗는 순간

비행기 안에서 잠을 깬 척이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씻기 위해 팔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놓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엄지 손가락에 감겨 있던 밴드 역시 풀어놓습니다. 이 순간은 자신의 몸에 감겨 있던 시간과 문명을 벗어버리는 의식이라고나 할까요? 쾅!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문명을 떠난 삶.

 

 

3. 무인도 1) -  "더이상 상처를 감쌀 밴드는 없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목숨을 걸고 건진 애인이 준 시계가 멈춰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문명의 시계도 함께 멈췄습니다. 드디어 cast away가 된 것입니다.

표류자가 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에도 감을 수 있었던 밴드, 이젠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보호할 그 어떤 약품도 없습니다.

 

4. 무인도 2) - 체념 -> 희망

자신과 함께 무인도에 밀려온 택배 상자들. 그 박스를 '혹시...' 하면서 고객을 위해 모셔둡니다. 하지만 며칠 개고생을 하고 나서는 무인도 탈출이 녹록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자연과의 싸움을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상자들을 뜯어서 필요한 물건을 찾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살아서 나가겠다는 희망에 찬 결심이었지요. 왜냐구요? 뜯지 않은 마지막 한 상자, 그걸 남겨두었거든요. '살아나가서 꼭 배달하리라....'

 

5. 무인도 3) - '자연스러운 표류자'

무인도 사 년의 삶은 그를 자연과 하나가 되게 말들었습니다. 어짜피 인간은 문명의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상태에서 시작되었기에, 벌거 벗은 몸으로 바다를 향해 창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결코 이대로 있을 수 만은 없지요. 다시 한번 문명으로의 탈출을 시도합니다.

 

6. 표류자 - '문명에서서 표류하다'

4년 만에 돌아온 문명의 품 속.

그를 환영하는 파티는 혼란스럽고 난잡하게 보입니다. 여기 저기 늘어져 있는 술잔, 그릇, 그리고 남은 음식들. 사건을 맞기 전날 가졌던 만찬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날 식탁은 아직 먹기 전의 정돈된 모습이었기에 안정감을 주고 풍성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반면, 식사가 끝난 이 자리는 먹고 남은 음식 쓰레기가 널부러진 무질서와 혼돈을 느끼게 합니다. 이제 그에게 이런 과거의 일상은 어색할 뿐 아니라 불편한 자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도 떠나고..... 모든 것이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는..... 문명 세계.

알고보니 그가 표류하는 것이 무인도가 아니더군요. 그는 무인도에서가 아닌, 바로 자신이 살던 그곳에서 표류자가 된 겁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자연에 있어야 자연스럽지, 자연인이면서 자연이 아닌곳에 자연스럽게 서 있으려니, 자연인이 자연인 답지 않고...(횡설수설)

 

 

7. 사거리 - '세상의 끝, 그의 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영화가 내건 케치프레이즈처럼, 이제 영화의 끝에서, 또 다시 표류자가 된 그의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절망이냐, 희망이냐. '꼭 배달하리라'고 다짐했고, 그 희망을 버리지 않게 했던 남은 한 상자. 그것이 그를 표류에서 구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결국 그 상자를 배달하고 난 그에게 더 이상은 할 일이 없습니다. 이제 뭘 할까. 어디로 갈 것인가.

사거리에서 지도를 펴놓고 고민하는 척. 그때, 다시 한번 구원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애인이냐구요? 아뇨, '그 상자' 주인입니다. 그에게 각각의 네 방향에 대한(세방향이던가?) 길을 가르쳐주고 떠납니다. 이 장면이 의미를 부여하는 게, 영화 첫 장면에서도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가 바라본 곳은? 네, 바로 그녀가 간 길입니다. 그곳은 '캐나다까지 뻥뚤려있다'는 그녀의 설명대로, 다른 길에 비해서 왠지 희망이 보입니다. 게다가 그 이쁜 여가가 간 길이고.... -,.-;

세상의 끝에서 다시 여행이 시작됩니다. 

2001년 3월 10일. 씨네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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