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내가  목사 안수를 받던 때.

목사의 길을 가는 동생을 축복하며 누나가 쓴 글이다.

가끔, 일년에 한 두 번쯤 되려나...이 글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난 요즘 '목사'에게 지워지는, 아니 '목사인 나'에게 스스로 지운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의 무게에 버거워 하고 있다.

 '내 목사의 길'을 돌아보며, 나의 앞길을 고민하며, 다시 한 번 이 글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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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정목사님.

이제 또 다른 정목사님. 정운형 목사님의 시대가 도래하였도다!

 

생기지도 않은 아들을 놓고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서원기도 하신 부모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정해 놓으신 꿈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으로 살아온 동생이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 '죄'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할 때마다 '어차피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결국 쓰시게 되어있다. 어차피 돌아서 돌아서 그 길을 가게 되어있다'하는 말에 올무가 되어 날개조차 펴 보지 못한 꿈들이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이렇게 목사 안수를 받고 말았다.

 

목사님은 무얼하는 사람일까? 목사의 자질은 무엇일까? 나는 평신도로서 어떤 목사를 원하나?

설교? 중요하다. 요즘 나는 설교에 목말라 있다. 들을수록 갈증나는 설교 말고, 한 방 들으면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그런 설교,,,,, 정말이지 듣고 싶다.

 

꼭 그렇다고 설교만은 아닌 것 같다.

 

목사가 목자라면, 예수님처럼 양을 먹이는 목자라면 '한 마리의 양'이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마음 아닐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말이다. 그리고 양의 필요를 가장 잘 알고, 그 필요를 채우주기로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목자. 그런 면에서 내 동생을 딱 목자이고, 목사이다.

 

나는 내 동생이 목사인 것이 자랑스럽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란 이름에 부끄럽게 스스로를 '직업'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생각이 될 때 더더욱 그러하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할 때마다 밤을 새우며 산고를 치르듯 하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목사'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을 조금이라도 이용하지 않으려, 정직하려 애쓰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무엇보다 약한 자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가진 것 무엇이라도 다 주려고 준비된 모습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 스스로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정직, 사랑, 헌신 결벽증'을 앓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도 된다. 결혼을 앞둔 동생이 '목사로서의 정체성'과 '남편 또는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갈 지가 기대가 되고 또 염려가 된다.

 

이 모든 과제를 안고 동생은 안수를 받자 마자 홀로 기도하러 떠났다. 마치 예수님이, 사도바울이, 다윗이 광야로 갔던 것 처럼 외롭게 기도하러 떠났다. 그렇게 기도하러 떠난 동생을 바라보면서 왜 이리 마음이 시린지 모르겠다.

 

아들을 서원하여 드린 것이 또 다른 무슨 죄처럼 매일 밤 눈물의 기도로 아들의 방황과 성숙을 지켜봤던 우리 엄마. 목사 안수를 받는 예배에서 쏟으신 눈물의 의미는 어쩌면 엄마와 하나님 사이의 말할 수 없는 사연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런 엄마의 기도가 있는 한, 동생의 사역이 때로 힘들고 어려울지언정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간이 많이 자나도 동생의 처음 마음에서 변질되지 않고, 작은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순수함을 지켜 나가고, 무엇보다 그로 인해서 기쁨의 열매를 많이 거두는 그런 앞으로의 나날이 되리라 믿는다.

 

목사의 길을 가는 내 동생을 온 맘으로 축복하며.....

 

 

2004.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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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목회를 그만두는가.  (0) 2012.08.27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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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공짜로 최신 기종을 준다는 TM(Telemarketing)에 속아 핸드폰을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몇 달 안 돼 고장이 나서 대리점에 가져갔더니 이 기종은 실패한 모델이라서 찾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금도 처음 얘기와 달리 과다하게 청구됐습니다. 처음 통화했던 분에게 항의 전화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 보라더군요.

 

몇 사람과 통화를 하고 난 이후에야 제가 전라도 전주 어딘가에 있는 대리점에서 전화기를 구입한 걸 알았습니다. 따져 물으니, 고압적 태도로 본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와의 통화가 녹음된 파일 내용을 들려줬습니다. 들어 보니 수차에 걸쳐 제게 전화하며 꼬였던 핵심 내용은 쏙 빠져 있고 제게 불리한 내용만 녹음이 되어 있더군요. 꼼짝없이 당하게 됐습니다.

 

시민 단체의 힘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리고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정의감까지 생기니 전의가 불타오릅니다. 수십 차례 대리점에 전화하여 따지고 또 따졌습니다. 나중엔 대리점에서 전화도 안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단계로 소비자고발센터(한국소비자원)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약속한 내용을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같은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며, 방송에서 보도도 됐는데 못 봤냐고 덧붙입니다. 실망스러웠지만 공기관에서 하는 공적 업무이니만큼, 그 이상 막무가내로 졸라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예전 간사로 일했던 '생활개혁실천협의회'의 회원 단체인 '소비자시민모임'이 생각났습니다. 줄여서 '소시모'라고 부릅니다. 바로 전화를 돌려 신고를 했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접수를 받아 준 간사님은 친절하게 "알아보고 연락을 줄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며칠이 지났을까, 전주에 있는 대리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전의 고압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친절하고 간사스러운 목소리로 "뭘 원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제가 요구만 한다면 백지 수표라도 줄 기세였습니다. 결국 모든 걸 환불받았습니다. 그리고 소시모에 접수한 걸 취소해 달라는 사정을 들었지만, 그건 그리 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순진한 소비자들을 위해서 이런 시민 단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담임목사직 팔다 들통 난 목사의 버티기

 

지난 1월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교인들 몰래 교회를 팔려던 시도가 들통이 났습니다. 담임목사와 후임 목사 간에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계약금까지 오간 상태였죠. 황당한 교인들이 목사에게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아직 50대인 이 목사는 "나도 퇴임 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되레 큰소리를 뻥뻥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은퇴비 1억 원을 내놓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목사가 계속 남아 있겠다는 말은 교인들에게 엄청난 협박이었습니다.

 

20명 남짓한 규모의 교회에서 은퇴금 1억 원이 웬 말입니까. 교인들의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간 목사 부부가 재정을 관리해 오면서 보였던 재정 횡령 의혹까지 더해 목사에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교회 건물이 내 명의로 되어 있으니 내 것이고 그걸 판다고 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다"고 주장하고, 변호사 자문까지 받아 왔다며 배를 내밀었습니다. 나갈 사람은 나가라는 거지요. 교인들은 노회에 호소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목사가 "이 모든 일을 노회의 허락(혹은 도움)을 얻어 했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노회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기자 무서워 줄행랑

 

마침 그때, 교인들이 방송 보도를 통해 교회개혁실천연대와 를 알게 됐습니다. 제보를 받은 저와 기자가 연달아 전화를 하자, 목사는 꼬리를 내리고 교인들 앞에 사죄했습니다. 그리곤 퇴직금 얼마를 받고 도망치듯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마도 '아무런 힘없는' 교인들 뒤에, '힘 있는' 단체와 언론이 버티고 섰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나 봅니다.

 

제가 수많은 교회 문제를 상담하면서 내린 잠정적 결론은 노회(혹은 지방회)가 개혁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혁 교단' 운운하지만 개혁은커녕 불의를 묵과하거나 타협하는 일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밥그릇 지키는 데 열심을 낼지언정, '정의'나 '공의'를 지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목사의 간통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아무런 징계도 하지 않는 경우를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치리 기능이 마비된 노회

 

'치리'라고 하는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역기능을 통해 부작용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순진한 성도들이 목사들에게 속고 노회에 또 속아도, 어디 누구라도 도와줄 이가 없는 겁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교회의 경우처럼 개혁연대나 에 제보했다고 해서 문제가 단칼에 해결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못된 목사에게 속고, 노회에 또 한 번 당한 교인들이 호소하고 비빌 언덕은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힘없는 교인들'에게는 그들 편에 서서 함께 울어 주고, 그들을 지지해 줄 그런 기관이 절실합니다.

 

어떤 분들은 "왜 꼭 교회나 목사의 치부를 들추고 있냐", "왜 자꾸 부정적인 이야기를 보도하냐"며 항의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정이 이렇습니다. 목사의 범죄를 발견한 교인들의 보통의 반응은, 일단 쉬쉬하는 겁니다. 몇 번 회개의 기회를 주고 문제 해결을 시도하다가, 조용히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이제 고발이나 공론화를 생각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단단히 심호흡을 하고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이 알려지기만 하면 교계와 온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힐 것이고, 목사의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대부분 빗나갑니다.

 

교회 문제 다루기 꺼리는 경찰과 언론

 

검찰이나 경찰에 고발을 해도, 교회가 특수 집단이라는 이유로 판결을 꺼립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언론은 물론이고 교계 언론마저 다뤄 주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기자와 경찰서는 조폭과 종교 문제는 다루기 싫어한다는 말이 나돌겠습니까. 설사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도, 목사가 교회를 나가지 않고 버티기 시작하면 교인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목사 뒤에는 노회(혹은 지방회)라는 든든한 '백'이 있으니까요.

 

이쯤 되면 교인들은 '과연 이 땅에, 한국교회에 정의는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법으로도, 교단 법으로도 처벌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교회 안 여론조차도 죄를 범한 목사를 감싸고돕니다. '설교권'을 가진 목사가 강단을 변명하고 여론 몰이를 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자한 얼굴과 언어로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교인들은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교인들이 밀려오고, 또 속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2010년에 쓰는 선지서

이들에게 는 마지막 희망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모든 언론이 보도하기를 거부해도 만큼은 범죄자의 불의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가 이 시대의 선지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 시대를 향해 죄를 고발하고, 선지서에 기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의 이러한 보도는 더 이상 이런 목사로 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습니다.(2007년에는 못된 짓을 하고 교인들 몰래 미국 교회에 이력서를 냈던 아무개 목사의 시도가 기사로 인해 성공 문턱에서 불발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끔 보면, 세상 법정도, 노회도, 교인들에게도 안하무인인 목사가 에는 벌벌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의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목사의 이름만 검색해도 그의 불의한 행동이 모두 들통 나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러한 의 사명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애정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고, 후원도 하고 있습니다. 가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동무' 1천 명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를 살리는 이 길, 함께 동참해 주십시오. 교회가 심하게 부패한 지금, 같은 언론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0. 3. 31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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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 년 동안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상담한 목회자의 성 추문 관련 사건들을 종합해 보면, 가해 목사들이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유사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추문이 불거지게 되면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문제의 특성상 이런 목사의 주장이 먹혀들어 가 끝까지 진실 공방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증인이나 녹취 파일 등 부인할 수 없는 자료가 나올 경우엔 더 이상 우길 수가 없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피해 여성이 이단이라며 마녀사냥 식 덮어씌우기를 시작한다.

 

필자는 이번 ㅈ목사의 성추행 사건의 전말을 지켜보며 매우 크게 실망하였다. '한국교회의 차세대를 이끌 명 설교자 ㅈ목사'의 성추행 자체에 대한 실망이야 말할 것도 없다. 우선 직무를 유기하는 ㅅ교회 당회의 결정이 그렇다. 그 교회의 장로들이 사적으로야 목사님을 이해할 수도 있겠고 존경하던 목사에게 선대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한다. 교회의 분란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인 생각 또한 이해된다. 사실 피해자와 성도들이 비분강개하는 이유도 목사가 성추행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필자가 교회 문제 상담을 하며 느꼈던 것은 성도들이 목사의 성 문제에 있어서 이상하리 만큼 관대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목사도 남잔데 한번쯤 실수할 수도 있지"라며 가해 목사에 대한 정죄를 자제한다. ㅂ목사, ㅊ목사는 수습 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성추행 보다 더 추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정성까지도 의심을 하게 만든 것이다. mc몽과 신정환. 시청자들이 그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군 입대를 피하기 위해 생니를 뽑았다거나, 거액이 걸린 도박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청자들이 그들을 버린 이유는 범죄 이후 반성하지 않는 그들의 뻔뻔한 태도 때문 아닐까. 목사의 이런 부정직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성적인 문제를 넘어서(실수라고 생각했던 경우), 목사로서의 기본적인 자질 문제로 확대된다. ㅊ목사의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외도한 것이 들통 난 ㅊ목사는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일삼고, 최초에 문제를 제기하는 성도를 모함했다. 결국 ㅊ목사는 성 추문이 촉발되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당회원들과 교인들이 ㅊ목사를 끝내 포기하게 된 것은 그가 외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후 그가 보였던 거짓되고 가증스러운 태도 때문이었다. 이러한 고통과 혼란스러움을 감당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주변 지인에게 털어놓게 된다.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피해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과 정의감으로 목사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따지게 된다. 그러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목사들은 '그런 적 없다'며 잡아뗀다.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지'라며 순진한 생각을 하던 피해자나 성도들이 가장 분노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아니라고 잡아떼거나, 문제를 무조건 덮으려고만 하는 목사의 뻔뻔한 태도로 인해 그에 대한 일말의 기대심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의 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공론화가 되는 경우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질 줄 몰랐으며, 이런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저 목사님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고, 그분이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 추문 관련 상담 사례의 경우, 피해자나 성도들의 반응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다. 처음 목사가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추행할 때, 전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당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아버지처럼 따랐던 목사의 권위에 눌렸기 때문이거나,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 상황에 충격을 받아 판단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장을 벗어난 피해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충격과 고통이 더 심해진다. 목사의 성추행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여성에 대한 성적인 학대일 뿐 아니라, 목사의 영적인 권위로 짓누른 영적 학대이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목회하던 ㅂ목사의 경우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는 여러 명의 여성도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일삼아 왔다. 모든 피해자들은 자신이 당한 끔찍한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속앓이를 하였고, 이로 인해 목사의 추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피해자가 친구에게 이야기함으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목사는 부인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속속 나오면서, 더 이상 목사는 아니라고 우길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목사는 피해자들을 '신천지 이단'이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사실 성 문제가 아닌 경우에도 이런 마녀사냥식 덮어씌우기 사례는 적지 않다. '2009년 교회문제상담소 상담 통계'에 따르면, 문제 제기를 하는 성도들을 이단으로 몰아간 경우가 전체 상담의 18%였다. 만약 목사의 개인 비리나 부정에 관한 사건으로 국한한다면 그 수치가 훨씬 더 높을 것이고, 목사의 성 문제의 경우는 90% 이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당회원'이 누구인가. 당회원은 일개 청년 리더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교회의 질서와 정의를 세워야 하는 공적 직무와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이 사건을 면밀히 살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것인지. 만약 그랬다면 주위에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이들의 '심각한 수준'의 인식과는 왜 다른 판단을 한 것인지. 그리고 그런 사실을 토대로 정말 교회와 교인들, 그리고 ㅈ목사를 위하는 판단을 한 것인지 의문이다. 만약 이런 해결 방식이 교회를 위한다거나 목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ㅅ교회 당회원들은 왜 교인들로부터 부여 받은 권한을 가지고 자신들이 선심을 쓰고 있는가. 누구를 위한 선심이며 무엇을 위한 선심인가.

 

목사의 성추행이 '실수'인 것을 입증할 방법은, 그 사건이 드러난 이후 얼마나 정직하고 겸손하게 수습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부디 ㅈ목사가 이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입증할 기회를 놓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바로 ㅈ목사 본인이 지난 2007년에 죄에 빠져 회개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쓴 칼럼이다.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는 누구보다도 파렴치한 성범죄에 청부 살인까지 저지른 잔혹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태도를 인정하셨다. 안타까운 것은 ㅈ목사의 주변에 나단 선지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단의 역할을 해야 할 당회는 선지자적 사명을 내팽개치고 있다. ㅈ목사는 외부에서 들리는 수많은 나단의 외침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외침들이 자신을 음해하거나 교회를 흔들려는 사탄의 계략으로 여겨진다면, 다음의 말씀은 어떠하신지. 의 보도대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이들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했을 정도라면, ㅈ목사는 스스로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최초 ㅈ목사 스스로 사임을 할 정도의 사안이었다면(그것이 단순한 쇼가 아니었다면), 왜 지금에 와서 '교회의 결정'에 따른다며 자신에게 너무나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는가.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갑작스레 떠나게 된 안식년을 "미자립 교회를 찾아서 그들 교회에 영적, 물질적 공급을 해 주는 '저수지 교회'가 되겠다"며 미화하는 태도는 또 무엇인가. 이런 반성 없는 태도는 ㅈ목사에 대한 실망을 더욱 커지게 한다. 만약 그런 상태로 설교와 목회를 계속하게 될 때, 그의 설교를 들을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ㅈ목사 자신을 위해서도 이런 식의 해결은 너무나 위험하다.

 

2010. 9. 24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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