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내가 아닐진대 당신들은 더더욱 아니다!"

 

덴마크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던 이들을 향한 키에르케고르의 일갈이다. 십 수년전, 내 귀에 꽂힌 이 말은 신앙의 연수가 더해갈수록 더욱더 선명해져 왔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그곳 시민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는 조국교회의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부패한 교회 지도자들,그리고 신앙과 무관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그는 분노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사명을 그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일깨우는 것이라 여겼다.

 

그간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타인을 향한 비판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케에르케고르 자신에 대한 선언이었다. 믿음, 제자도, 십자가, 헌신, 사랑 등 그의 묵상 속에서 그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을 했왔다. 하지만 오늘은 '나는 아니다'에 더해 '그러니 더는 더더욱 아닌 것 같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종합적으로 곱씹어 본다.

 

이광선목사 길자연 목사의 야합(언론 보도 이면에 있는 이들의 정체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명박 장로의 거짓과 꼼수. 이 두 가지 소식을 접하며.....

 

'나는 목사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너희들은 더더욱 아니다!'

 

2011년 6월 2일. 한기총 사태를 바라보며.

Posted by 숙맥불변
,

필자가 지난해까지 3년간 사무국장으로 활동한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인들을 상담하며 얻은 결론이 있다. 교인들의 과도한 섬김은 목사를 변질시키며, 목사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한은 목사를 부패하게 할 뿐 아니라 교회를 병들게 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교회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민주적 교회를 만들어서 목사가 설교와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목사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엡 2:20~22)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전문 지식과 통찰력이 반영됨으로써 목회의 효율도 극대화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적 교회를 만드는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목사가 가지고 있던 권한을 나눠 주는 일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교회 내에 민주적 소통을 이뤄 내는 과정도 말처럼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교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이 글에서 평신도들이 교회의 주체로 서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민주적 교회를 만들기 위해 목사와 성도들이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 것인지, 민주적 교회는 어떤 모양일지, 어떻게 권한을 나눠 줄 것인지에 대한 도움을 얻게 되길 기대한다.

 

문제 발생은 목사와 성도 간의 단절에서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강단에서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우리 교회 참 좋은 교회입니다." 내용인즉슨, 성도들끼리 다투지 않아 평안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점심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간접적 표현으로) 본인 설교는 늘 은혜 충만하고….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교인들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인 중 대다수는 오히려 목사의 설교 때문에 더 깊은 갈증을 느꼈고, 교회 생활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담임목사는 진심으로 자신이 말한 대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목사와 성도들이 체감하는 교회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이토록 괴리가 심할 수 있을까.

 

그 교회에 다니는 성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소위 '인(人)의 장막'에 갇힌 목사와 성도들 간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목사 자신이 귀에 달콤한 말만을 전하는 측근(?)에 둘러싸여 교회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목사와 성도들 간의 이러한 '소통 두절'은 필자가 그 이후 경험했던 교회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담임목사나 소수의 장로에 의해서 독재적으로 목회(운영)되고 있는 교회들의 공통적 현상 중 하나는 바로 '소통의 단절'이다. 독재적 지도자 옆에는 항상 간신배가 있기 마련이다. 교인들의 요구나 정서와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피드백만을 전하는 무리들 말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무한 긍정의 견해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착각에 빠지게 하고, 소위 말하는 '자뻑(?)의 감옥'에 갇히게 한다는 것이다.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한다'는 이의용 교수의 말대로 많은 교회들이 소통의 불통으로 인해 아파하고 있다.

 

서울 홍제동 S교회 역시 '소통'이 '불통'되는 교회였다.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할 제직회는 늘 요식적인 진행으로 불통을 확인하는 현장이었다. 모임 시간도 예배를 마치고 식사하기 전이다 보니, 심도 있는 토론을 하기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고, 당연히 제직들의 참여가 저조했다.

 

이 교회는 최근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신도사역협의회'를 만들었다. 평신도사역협의회의 구성원은 제직회의 부장·차장과 자치회(남선교회·여전도회·청년회·학생회)의 회장·총무, 보직이 없는 항존직들이다. 이 자리에는 목사도 1/n로 참여한다. 모임은 분기마다 1회로 하고, 충분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교회의 주요 사역을 모두 마친 주일 늦은 오후에 모인다.

 

둥그렇게 둘러앉는 좌석 배치로 진행자와 참여자의 차별을 최소화하였다고 한다. 이 모임은 연령이나 직분에 차등 없는 발언권으로 수평적인 논의 구조가 정착되었다. 최근에는 제직회보다 더 많은 숫자가 참여하고 있으며, 제직회에서는 잘 발언하지 않던 여자 집사들의 참여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슈들을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김장하기, 주차장 포장, 에어컨 보수 등)

 

의사 결정 권한은 없으나 간담회 형태로 충분한 협의를 거쳐 민의와 여론을 당회와 담임목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해 성도들은 교회의 사역이 목회자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성도와 목사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고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공동 목회

 

1986년 개척한 새민족교회(예장통합·목사 김영철)는 1999년 말, 새로운 세기에 걸맞은 교회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한 논의에서 두 가지 방향을 설정했다. 하나는 교회가 지역 사회를 향한 문화적 기능을 감당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의 깃발을 다시 일으켜 평신도 운동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이다. 논의 끝에 평신도 중심의 기획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위원회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운영위원회라는 이름을 거쳐 2003년 '교회위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위원회는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교회 운영의 중심 기구로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공동 목회를 하는 틀이다. 위원은 선출직 직분자 3명(장로 1명, 권사와 안수집사 중 2명), 등대(다른 교회의 목장, 혹은 구역) 대표 3명, 교사 대표 1명, 담임목사, 젊은이교회 1청년 대표 등 9명으로 구성한다. 이들은 교인 총회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2년으로 한다. 단, 1년 이상 휴무한 뒤에는 다시 선출될 수 있다. 특별히 교회위원회 위원장은 목사가 아닌 평신도 제직 중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새민족교회의 규약은 교회위원회가 교회 운영에서 기본 운영 방침, 사업 계획 수립, 재정 운영 계획, 인사, 선거 관리, 목회자 청빙, 교회 전 기관과 부서에 대한 감독, 교인 총회에서 위임한 사항, 기타 다른 기관이 담당하지 않는 업무를 관할하는 심의 의결 기구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당회와의 관계다. 교회위원회의 직무가 보통의 장로교단 교회의 당회가 하는 직무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든 민주적 운영을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될 때, 기존 교회 구조의 당회 직무와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게 된다. 새민족교회의 경우는 당회의 의사 결정 기능을 배제시켰다. '장로'에게는 말 그대로 교회의 어른으로서 교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임으로 교우들의 신앙을 살피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리고 장로교단에 소속된 교회로서 불가피하게 관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회(노회, 총회)와의 법적 역할을 수행하게 해서 불필요한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평신도와 목회자가 공동으로 목회하는 민주적 운영 구조를 만들기 위해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노력해 온 새민족교회는 2010년 현재 제8기 교회위원회가 활동을 하고 있다.

 

평신도 사역의 주체가 되기까지

 

매년 초, '이런 교회 다니고 싶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있는 예인교회(독립교단·목사 정성규)도 평신도 중심으로 사역하는 대표적 교회다. 예인교회의 경우 운영위원회가 새민족교회의 교회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11월 개척한 예인교회는 설립 과정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의 교회가 담임목사를 포함한 극소수의 교인들이 건물부터 임대해 놓고 사람을 채워 가는 형태인 반면, 예인교회는 50~60명의 '사람'들이 모여 시작하였다. 교인 중 대다수가 이전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전횡으로 인한 상처를 가진 분들이었기에,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운영은 민주적으로, 소유는 최소한, 나눔은 최대한'이란 모토를 전면에 내세웠다. 시작은 그럴 듯했으나, 민주적 운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교인들은 그동안 신앙 여정이 수동적이고 의존적이었기에 교회 일을 주체적으로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호소를 했다. 심지어 운영위원회에서 '주일 날 김밥을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결정조차도 자신들이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담임목사에게 결정을 부탁하였다. 과거 교회에서 '성직 vs. 세속'이라는 극단적 이원론에 세뇌되어,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상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담임목사나 평신도 모두를 당황케 했다. 정성규 담임목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에게 부여되고 있는 권한을 장기간에 걸쳐 이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은 '신앙 용어 바로 알기'라는 성경 공부 과정을 통해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여, 성도들의 잠자는 의식을 깨워 나갔다. 이와 병행하여 자신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지만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고, 발언조차도 최소화하며 모든 결정권을 성도들에게 맡기고 기다렸다. 정 목사의 이런 태도는 진행되는 일을 더디게 하였고, 이로 인해 성도들은 큰 부담을 느꼈다. 그야말로 '비효율적'이었다.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 목사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최근에야 결과를 보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개척 10주년을 맞는 올해 비로소 정 목사는 모든 행정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목사의 주인 의식, 평신도의 주인 의식

 

주의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은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이에겐 당연하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는 결단이, 어떤 이에겐 군중 속에 숨어 안주하고 싶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아픔이 요구되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건강한 교회 만들기의 모범 답안이 될 수 없으며 특별한 장치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교인과 교인, 목사와 평신도 간의 건전한 소통을 위한 진실한 노력이 건강한 교회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또한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질 뿐 아니라 자신의 짐(때로는 '짐'이 '기득권'일 수도 있겠지만)을 서로에게 믿고 이양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대다수 교회의 문제는 목사의 과도한 주인 의식에서 비롯한다. 건전한 애정의 발로로서의 주인 의식이 아니라 과도한 소유욕에서 비롯한 독재적 성향이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다. 이는 당연히 교회의 건강성을 해칠 수밖에 없다. 평신도가 교회 운영에 대해서 순종과 은혜의 원리를 내세워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 역시 같은 문제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서는 그 권한을 또한 당신의 백성에게 위임하셨다. 목사는 '성도'에게 위임된 그 권한을 왜곡된 신학을 내세워 독점할 것이 아니라 평신도와 함께 진리와 사랑으로 공유해야 할 것이다. 또한 평신도들은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감당해야 할 소명이 있다.

 

평신도들이여, 교회의 머리는 당신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며 당신은 그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일무이한 '지체'임을 스스로 일깨우기 바란다. 그러할 때 그분의 몸은 더 이상 독재와 부패로 신음하지 않고 건강과 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복음과상황>2010년 3월호.

Posted by 숙맥불변
,

언젠가 어느 목사님들의 모임 슬로건이 '목사도 천국가자'라는 말을 듣고 공감하며 크게 웃었다. 내가 '우리도 천국가자'는 목사님들의 구호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목사들이 천국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교회문제상담소를 통해 수많은 '문제(?) 목사'들을 접하다보니 이런 발칙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내담자 A집사는 지인을 전도하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소개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 교회 담임목사의 인격이 너무 부끄러워, '우리 교회 나오지 말고, 자네 동네 교회로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 교회 목사의 인격이 너무 상식 이하라며, 교회 안 다니는 일반인들(?)의 평균 수준만 됐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모든 목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목사님들도 적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그러면 '모든' 목사들이 자신을 그 '적지 않은 선한' 목사로 생각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말하기는 했다.) 물론 글을 쓰는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나 자신도 목사로서 그 위험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을 가끔 자각하게 된다. 삶은 그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선한 목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볼 일임을 고백한다. 작년 한해 동안 200회가 넘는 교회 문제를 상담하면서 절감한 바는, 목사들이 심히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목사의 이러한 모습이 교회 분쟁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고치는 목사가 '믿음'이 좋다?

 

한국의 대다수 교회가 지닌 신학에 따르면, 우리도 천국 가자고 외치는 목사는 목사로서 자격이 없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런 나약한 믿음으로 어찌 목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사고 치는 목사'는 믿음이 투철하다.

 

오래 전 여자 문제와 돈 문제로 교회를 발칵 뒤집어 놓고도, 자리를 지키며 버티던 B목사에게 선배 목사가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지옥가고 싶으냐'며 충고를 했단다. 그러자 B목사 왈, '믿음으로 구원받지 행위로 구원받습니까?' 우리도 천국 가자는 목사님들의 외침이 반가운 것은, 보기 드물게도 이분들이 스스로를 성찰하는 분들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왜 이렇게 상식 이하의 목사들이 많은가? 개혁연대에 제보되는 목사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는가? 아마 처음부터 '진정성' 자체가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내담자들이 심심치 않게 하는 이야기가 '우리 목사님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엔 좋은 분이었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이 변하더란다.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성도들의 과도한 섬김이 목사를 망친다

 

내담자 C장로의 분석에 따르면, 성도들이 맛있는 것, 좋은 옷, 좋은 차를 갖다 바치고 섬겨주니까 교만해져서 그렇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목사로서 지금도 얼마나 과분한 섬김을 받고 있는가. 가끔 그런 과분한 섬김을 당연하게 받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스스로를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며, 섬길 것을 강요하기도 한단다. '주의 종'이란 말이 무색해진다. 처음 목사가 될 때 초심이 어떠했든지, 생각이 이렇게 뻔뻔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에게서 다른 뭘 더 기대하겠는가.

 

설교에 대한 피드백도 큰 역할을 한다. 우리 한국 사회, 한국교회에서 누가 설교자에게 부정적 반응을 보이겠는가. '은혜 받았습니다' 일색이다. 자신이 설교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드물 것이다. 얼마 전 S교회 장로들이 자기 교회 담임목사가 다른 목사 설교문을 그대로 베껴 설교하는 걸 알게 되었단다. 장로들이 모른 채 하며 '우리 교회 상황에 맞는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하자, 목사는 오히려 '내가 우리 지역에서 설교 제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역정을 내더란다. 이런 지경이다보니 성도들 앞에서 '모른다' 소리도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는 듯 착각한다. 심지어는 성도들의 사업에까지 관여하고, 부동산 투기 상담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대형 교회 목사가 설교 중에, '자신이 교인들에게 사라고 땅을 지정해주면 땅 값이 몇 십 배 오른다'며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이래저래 목사들은 교회라는 성 안에 갇혀서 정작 세상이 자기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목사들의 의식이 세상의 상식으로부터 격리되어 게토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목사님들이여, 착각하지 마시라.

 

목사를 무당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목사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가 있다. 목사 스스로뿐 아니라 성도들이 목사를 하나님과의 중보자로 착각하는 것이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도들의 이러한 인식은 한국인의 종교의식 밑바탕에 깔린 무속신앙에서 뿌리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일부(?) 목사들이 이를 악용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든 아니든 목사들 자신이 스스로를 성도들과는 다른 어떤 존재로 여기기 시작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무당이 된 목사에게 도덕성이나 윤리성은 중요하지 않다.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과 선포는 오히려 불편하다. 기적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홍보하고, 강한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압도하는 그런 목사가 능력 있는 종이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능력과 카리스마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사들의 능력으로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지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대한다. 능력의 종! 기복주의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목사가 아닌가? 하지만 이로 인해 목사와 성도들 모두 심각하게 병들고 변질 되는 것이다.

 

목사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한이 목사를 망친다

 

목사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한 역시 목사를 병들게 한다. 각 교단이 가지고 있는 '헌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헌법'이라는 것은 한 국가 통치 체제의 근본이 되는 최고 법규를 말하는 것인데 버젓이 '헌법'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용어 사용에서부터 '헌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목사들의 권위 의식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헌법'의 내용은 어떠한가? 독소조항투성이다. 모든 권한을 담임목사가 가지고 있다. 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회의체의 의장을 담임목사가 맡는다. 장로교의 경우 당회장, 제직회장, 공동의회장을 모두 담임목사가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헌법'에 보면, '목사의 의의'를 이렇게 규정한다. '양의 무리를 감시하는 목자', '그리스도의 사역자', '신약의 집사', '치리하는 장로', '교회의 사자(천사·계2:1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사신',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 등등.('헌법' 제4장 제1조) 이러한 내용은 타교단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하다. '헌법'에 따르면 목사는 법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감히 평신도가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다.

 

한국교회는 개 교회 목사에게 그런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음에도 이를 통제할 장치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다수의 목사들은 북한에 대해 목숨 걸듯 비판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그들과 꼭 닮아 있는가? 비민주적이고, 반대 의견은 철저히 묵살하는 행태는 김일성 정권과 못지않다. 게다가 세습까지 하는 걸 보면 그야말로 독재다.

 

목사 제자리 찾아주기

 

 

이렇듯 왕처럼 섬김 받고, 자타 공히 하나님의 천사라 여기며, 무소불위의 법적 권한을 부여 받은 목사들이 겸손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렵다. 자칫하는 사이 자신을 하나님 바로 다음 자리에 앉히기 쉽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을 기억하라. 절대 권한을 부여 받은 목사는 '부패'와 '변질'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저 추상적인 규정이 아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 목사 개인의 인격이나 믿음만을 믿고 맡기기엔 너무 위험하다. 교회도 위험하고 목사도 위험하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한국교회에는 교회의 분란이 잠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목사들에게 그런 자리에 서게 되더라도 교만해지지 말고 겸손하라고 요구만 하면 될 것인가. 이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놓고 참으라 하는 격이다. 혹시 대단한 영성을 소유한 몇몇 고양이가 참아낼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고양이는 생선을 먹고 말 것이다. 현재의 이런 구조는 목사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에게 기대하기 어렵다면, 성도들이 깨어날 것을 기대하겠는가. 성도들이 누구에게 교육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시라. 왜곡된 자기 정체성을 가진 목사들이 가르친 성도들에게 깨어나길 기대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목사가 겸손한 자세로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교회에 민주적인 정관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민주적 정관 도입을 통해 목사, 혹은 소수의 장로에게 편중된 과도한 권한을 제한하고, 교회의 주권을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정관 도입만으로 교회 내 모든 비성경적인 권위주의 문제와 그로 인해 불거지는 문제들이 일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민주적 정관을 도입해 운영하는 것은 교회 분쟁 원인인 목사에게 집중된 권력 문제와 부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건강한 목사,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를 통해 목사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인 올바른 해석을 위한 말씀 연구와 선포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담임목사의 독재 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실하다.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는 중세의 사제주의와 권위주의에 저항했던 개신교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모든 권한을 향유하고 있는 목사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하고, 교회의 주권을 교인들에게 돌려주어 성경이 기대하는 바, 민주적인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교회의 민주적 운영에 관하여는 백종국 교수의 저서 를 참고하라.)

 

2009. 7. 16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