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의도하지 않게 채널을 돌리다 기독교 케이블 방송을 통해 설교를 '보는' 경우가 있다. 굳이 설교를 '본다'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이 설교자들의 설교가 그야말로 쇼(show)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개그맨이라도 되는 양 웃기려 애를 쓰시고, 트로트 가수처럼 찬양을 꺾어 부르며 박자에 따라 간단한 댄스도 하신다.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들의 기대만큼 웃기지도 않다.

 

설교로서 평가하기는 좀 그렇고, 개그로 봐도 너무 저질 개그다. 별의 별 캐릭터가 다 등장한다. 반짝이는 양복 가슴 주머니에 손수건을 꼽고는 멀끔하게 생긴 외모로 어필하려는 목사. 속사포로 말하면서 가끔 심형래 흉내도 내며 바보연기를 하는 목사. 부모라도 되는 양 반말로 성도들을 막 혼내는 '무대뽀' 목사. 밤무대 가수 같이 찬양하는 목사 등등. 이 설교를 '보고' 있노라면 주로 분노가 끌어 오르지만, 때로는 '개콘'과 '웃찾사'에서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개그맨들을 보는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순종하라, 헌금하라, 축복 받는다!"

  

그런데 별의 별 '짓'을 다하는 이들의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다. '순종하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다는 것이다. 얼마 전 상담한 내담자가 자기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가 듣기 괴로운 수준이라며 한탄했다. 1년 365일, 어떤 본문으로 설교를 해도 결론은 '순종하라, 헌금하라, 축복 받는다!'라는 것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이런류의 호소를 자주 듣는다. 방송 설교를 보면서, '아, 이런 기분이구나'하며 그 성도의 고통을 잠시마나 생각했다.

 

그런데 참 희한한 현상은 교회에서든, 방송에서든 그런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내담자의 말마따나 교인들은 교회에 갈 때, 이성과 상식을 주차장에 놓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 의심이 된다. 방송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후원금을 내야 한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긴 하지만(제보도 있었다.), 아무리 많은 후원을 해도 듣는 사람이 없고, 항의 전화가 빗발친다면 어찌 방송이 가능하겠는가.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울의 예견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기 욕심을 따를 것이며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교사들의 말을 들으려고 그들에게 모여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외면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3-4, 현대인의 성경)

 

어쩌면 인지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리, 고난, 십자가, 희생, 제자의 길, 이런 주제가 한두 번 정도야 괜찮겠지만, 계속 듣기는 힘든 내용이다. 하지만 축복, 성공, 부흥 뭐 이런 내용이라면 설교의 수준과 상관없이 들어도 들어도 좋은 것 아니겠는가. 여기가 바로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딤전 3:3)을 채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스타가 되고 싶은' 이런 광대 목사들의 필요가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면서 그 교회를 향해 축복을 외치는 설교는 독(毒)이다

 

내 생각에는 이런 설교들에 대해서 단순히 '수준이 낮다'고 평가하고 말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그저 저질인 것이 아니다. 독(毒)이다. 성도들의 눈을 흐려 놓고, 십자가로의 접근을 차단하고 방해하는 장애물이요, 독인 것이다. 이런 독과 같은 설교는 그저 성도들의 수준을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저질로 비춰지는 설교 뿐 아니라, 상당수의 목사들이 세련된 언어와 고도의 지식을 동원하여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작금의 한국교회가 '세속화 되고, 귀족화 되었다'고 진단은 하지만, 정작 세속화되고 귀족화 된 교회를 향하여서는 축복과 평강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평강하다 평강하다'만을 외치며 백성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 결과는 멸망이었다. 한반도, 한국 사회와 교회, 그 한 복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평강과 축복만을 외치고 있는 그들은 '망하게 하는 자'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설교의 홍수 속에 기근과 기갈(飢渴)

 

설교 방송, 설교 테이프, 설교집, 그야말로 설교 홍수의 시대이다. 그러나 정작 그 설교의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요 기갈(飢渴)이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신 그 심판의 때가 생각난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아모스 8:11b-13)

 

진정 지금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정직한 선포가 절실한 시대이다. 한국교회가 망하지 않으려면, 변질되고 왜곡된 설교를 버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개혁연대는 지난 2008년 한국교회 개혁의 10대 과제를 발표하면서 그 중 하나를 '왜곡된 성경 해석의 수정'으로 꼽았다. 이는 한국교회가 다시 살기 위해서 뒤틀리고 왜곡된 말씀해석과 선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설교에 대해 질문하자! 설교에 대한 의견 듣자!

 

 내가 존경하는 설교자 J목사가 있다. 그는 한 번의 설교를 위해 본문을 깊이 연구하고 산고를 겪는 듯한 시간을 거쳐 설교문을 작성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설교한 만큼 살려고 치열하게 싸운다. 그의 설교 초년 시절에 항상 그의 설교를 듣고 코멘트를 주는 B집사가 있었다. B집사의 지적은 예리하다 못해 너무 직설적이어서 필자가 옆에서 듣기에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J목사는 B집사의 지적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J목사의 설교가 오버(?)하거나, 논리적이지 않거나, 혹은 현실적 삶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를 할라치면 어김없이 설교를 마치고 의견을 전한다. 그런데 J목사는 그 B집사가 너무 고맙단다. 그를 자신의 좋은 선생님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J목사 같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실 것이다. 맞다. 본인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교는 더욱 그렇다. 필자 역시 설교를 하는 목사다. 그래서 내 설교에 대한 비판을 듣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솔직히 고백하면 가끔 '설교가 너무 길다'는 '정확한'(?) 비판에도 마음이 불편해 지는 것이 사실이다. 주로 '은혜 받았습니다'류의 긍정적인 피드백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만일 성도들이 설교에 대해 솔직한 질문과 평가를 전할 수 있고, 설교자가 이에 대해 답변하는 제도가 도입된다면 우리 한국교회의 설교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박득훈 목사가 시무하는 언덕교회의 경우 예배를 마치고 설교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성도들은 들은 설교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의견을 얘기하고, 설교자는 이에 답변한다. 당연히 설교자는 철저히 준비하게 될 것이고, 성도들과의 대화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은혜가 임하지 않을까 생각 된다. 

 

한국교회의 설교를 건강하고 은혜롭게 하기 위해 이런 제도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우선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 비평에 대해 좀 더 열린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한 성도들 역시 설교에 대해 과연 하나님의 뜻이 담긴 내용인지 살피는 자세도 중요하다. 마치 베뢰아 성도들처럼(행 17:11). 강단에서 어떤 소리를 해도 다 믿어버리거나, 침묵하기 때문에 이런 거짓목사들의 폭주가 계속되는 것이다. 황당한 거짓말로 속이는 거짓목사들의 설교를 분별하고, 교회가 그런 말씀에 오염되지 않도록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경회(査經會)

 

 한국교회 초기, 성도들은 사경회(Bible class)라는 이름으로 모여 말씀을 배웠다. 며칠, 혹은 몇 주씩을 사경회에서 성경을 공부하였다. 김영재 교수는 라는 책에서 '1960년대 이후 성경공부를 하는 모임의 성격이 점차 변질되었다'고 지적했다.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흥사경회, 부흥회로 불리 우는 집회들은 '말씀을 배우겠다'는 목적보다는, 교회 조직의 세를 불리기 위해 동원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또한 '성령대집회', '축복성회' 등의 집회로 모이면서 신도들의 인간적 욕망을 맘껏 충족시켜주고 있다.

 

다시 말씀을 열망해야 한다. 개혁연대는 이 설교 홍수의 시대에 또 하나의 설교의 장을 마련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 많은 성도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맛보고 그것을 더욱 열망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또한 영적 갈증을 느끼는 성도들께서 잠시나마 생수를 체험하시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돌아가자. 그 말씀 앞에 서자!

 

 

2009년 4월 16일.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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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시절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60년 이상 분열되어 있던 4개의 장로교단이 한 자리에 모인 연합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내게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결국 머리보다 먼저 마음이 움직였다. 시작도 하기 전, 참으려 애썼지만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닦으며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지난 이틀간 전쟁터와 같았던 부총회장 선거와 회의를 참관하며 느꼈던 답답함과 안타까운 심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런 모습 그대로 ‘하나됨’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훗날 역사는 과연 이 모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옆에 있던 김애희 실장이 심정을 물었다.

 

“국장님, 소감이 어떠세요?”

 

“만감이 교차하네요.”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뮤지컬 ‘선교사 이기풍’이 상연되었다. 어릴 적 보았던 시골교회에 모여 이기풍 선교사의 영화를 봤던 생각이 났다.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이기풍 선교사가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구렁이에게 온 몸을 감긴 채 사투를 벌이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도 제주 지역에 복음을 전하면서 이기풍 선교사가 겪었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복음의 불모지에서 헌신했던 이기풍 선교사는 100년 후 제주를, 아니 한국교회를 어떤 모습으로 기대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렇게까지 거대한 교단으로 자라날 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세속화될 줄은 더더군다나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의 순수함, 처음의 열정, 그걸 회복해야 하는데.

 

순서지를 들여다보니 정말 많은 순서와 담당자가 있었다. 네 개 교단의 연합예배이니만큼 그럴만도 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연합예배 담당을 놓고 교단간의 갈등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터라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묵상기도, 찬양, 기도, 1930년대 장로교회의 일반적 순서에 따른  역사적 예배가 시작되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변화와 연합을 위한 기도가 간절히, 간절히 드려졌다. “주여!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그 날을 속히 이루어 주소서!” 기도하며 찬양하며 눈물이 계속 나왔다. 감격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초라하고 추한 내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이 슬프고 죄송스러웠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가 시작되었다. 합동 총회장 최병남 목사께서 강단에 섰다. 본문은 사무엘상 17장, 다윗과 골리앗의 결투장면. 거인 골리앗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다윗은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설교자는 서두에 우리 민족이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환란과 시련’, 교회적으로는 ‘사이비 이단’의 위기임을 진단하고 있다.

 

어떤 시대, 어느 국가에도 걸맞을 두루뭉술한 위기진단들 중에 눈에 띄는 구체적인 위가가 하나 있다. ‘북한 핵 문제로 인한 민족의 위기’가 그것이다. 어쨌든 이런 진단과 본문에 대한 언급 이후에 그 처방은 바로 ‘기도’였다. 기도하면 민족도 하나 되고, 교계도 하나 되고, 경제 문제도 해결된다고 한다. 위기에 대한 진단도, 처방도 그다지 동의가 되지도 마음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설교 중간 중간 마이크를 바짝 대고 소리치며 반복하는 문장들 때문에 귀가 불편했고, 그것이 마치 ‘아멘’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마음도 불편했다.

 

예배 중 제주선언문이 낭독되었다. 모든 교단의 염원과 다짐을 담은 선언문이었다. 사치와 향락에 대한 반성, 갈등에 대한 반성, 환경 문제와 세계 도처의 참상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결의,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충만히 임할 것을 기도하며 다짐하였다. 또한 선언문을 통해 이러한 다짐과 결의를 ‘힘써 이행’할 것이며, 이를 위한 후속조치를 강구할 것을 천명하였다. “아멘!” 이렇게만 된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저 ‘선언’이 되지 않기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이 교회 위에 충만할 그날이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모든 순서를 마치고 사회를 보던 통합 총회장 김삼환 목사께서 강단에 나와 있던 지도자들과 청중들에게 회개 기도를 제안했다. 순서에 없던 일이었다. 신사참배에 결정에 대하여, 교단 분열에 대하여,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데 대하여 무릎 꿇고 손을 들고 회개하였다. 그 모습 자체로 감동적인 일이다. 또한, 신사참배를 결정한 지 70년이 지나 4개 장로교단이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자복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신사참배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했었다면 독재정권을 찬양해서는 안 된다. 독재정권을 찬양한 것을 진정으로 회개한다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군사정권에 면죄부를 줘서도 안 된다. 만일 지금 신사참배를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이명박 정권의 불의한 정책에 동조해서도, 침묵해서도 안 된다. 이런 역사를 반복하고 70년이 지난 뒤 우리 후손들에게 회개의 책임을 넘길 것인가? ‘역사’가 지금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숙고해야할 일이다.

 

나는 회개의 제스처가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회개의 언어가 아름답고 추상적일수록 ‘진정한 회개’의 가능성이 낮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런 경우 그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이번 연합예배에 대한 노파심이 크다. 감격하고, 부둥켜 안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돌리고... 그걸로 만족하고 끝내지 말기를. 이 모임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와 변화, 하나됨의 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2008년 10월 10일. 뉴스앤조이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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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 한국교회는 사회의 '앞섬이'였다."

 

숭실대 박정신 교수의 말이다. 박교수에 따르면, 구한말 한국교회는 변혁과 개혁의 시기에 역사와 시대를 앞서서 변혁하는 공동체였다고 한다. 교회가 교육·문화·여성문제·정치문제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앞섬이'로서의 교회는 해방 직후 권위주의 시대, 군사독재시대를 지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작금의 한국교회는 오히려 모든 면에서 사회보다 뒤쳐져 있는 ‘뒷섬이’가 되었다고 탄식했다. 작년 한 해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굳이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교회에 대한 대사회적 이미지는 냉소적 시선을 넘어서 혐오의 수준에 가까웠다.

 

그러한 혐오 증상은 2008년이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고착되는 듯하다. 왜일까? 교계의 원로이신 옥한흠 목사가 '한국교회가 세속화되었다'고 했으며, 조용기 목사는 '귀족화되었다'고 진단하였다. 세속화와 귀족화. 그렇다. 한국교회는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 현상이며 한국교회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회가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이 시점에, 교회가 왜 세속화되고 귀족화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개혁은 상황과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맘모니즘 : 2단 vs 4단

 

 얼마 전 중년의 집사님으로부터 상담 전화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딸이 취업을 준비하는데, 직장 상사로부터 D교회를 출석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D교회는 10년 전 메이저교단들로부터 이단판정을 받은 교회다. 딸의 앞길을 생각하면 직장 상사의 권유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에 보내기도 찜찜했던 것이다.

 

D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신앙적 문제에 대해 한참 동안 설명했다. 상담을 마치려는데 마지막 질문을 건네 온다. D교회가 다시 기성교단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없는지, 그 교회의 문제들이 그리 심각한 것인지. 이 질문 앞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 현재 기성교단, 정통교단 안에서는 웬만한 이단 못지않은 이단적, 비성경적인 모습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2단(이단)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면서 4단(사탄)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제는 그 사탄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사탄의 실체는 바로 맘몬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같은 위상을 두고 비교하며 경계하셨던 바로 그 맘몬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중국에서 탈북자 사역을 했다. 그때 만났던 북한지하교회 성도의 한마디. “한국 교회를 위해 우리가 기도하고 있시오.” 한국교회가 북한의 우상화를 걱정하면서, 보이지 않게 침투해 있는 사탄의 세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우려되는 일이다.

 

"자본주의, 한국교회를 접수하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의 이 표현은 맘몬에 사로잡힌 한국교회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천박한 자본주의, 맘모니즘에 깊이 물들어 있다. 이 땅의 구석구석, 심지어는 자연과 생태계까지 이미 맘몬의 포로가 되어 있다. 오죽하면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말이 유행하겠는가. 이러한 맘모니즘의 흐름에 교회 역시 저항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개혁연대 부설 교회문제상담소(이하 상담소)는 지난 2007년 총 80여건의 교회문제를 상담하였다. 거의 대부분이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과도한 사례를 요구하는 목회자, 재정 비리에 대한 제보, 교회 재산권을 가지기 위한 분쟁 등 ‘돈’은 교회의 분쟁을 지속하는 동력이요, 부패를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인 것이다.

 

맘모니즘은 그 외면을 살짝 포장하여 목사를 유혹한다. 성장제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목회자의 목회적 야망을 자극하여 '부흥은 성령께서 주도하신다'는 명제가 '성장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흥시킨 교회', '큰 교회 목사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종'이라는 명제로 왜곡되었다. 그렇기에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성장의 과정을 하나님이 보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당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심지어 그것이 말씀에 대한 왜곡이라 할지라도. 돈을 벌고 싶은 성도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축복을 남발한다.

 

경상대 백종국 교수는 1990년대 이후의 한국은 천민자본주의가 전개되고 있었고 한국교회 역시 천민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 내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교회의 성장제일주의로 드러나고 있으며, 성공(성장)하면 그가 저지른 모든 행위들이 정당화되는 풍토가 만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형마트가 지점을 내듯 지교회를 세우고, 백화점에서조차 금지한 셔틀버스로 성도들을 쓸어 모으고, 이것이 '능력'으로 평가 받는 풍토. 바로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어찌 귀족화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귀족화는 당연한 귀결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대교회를 부러워한다. 안타까운 것은 적지 않은 신학생들의 비전이 대교회 담임목사라는 현실이다.

 

기복주의 : 능력의 종을 요구하다

 

맘몬은 성도들의 기복적 정서를 자극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슬쩍 꿰차고 앉는다. 우리 인생의 구주시고 주인이신 하나님보다는 '나로 하여금 부자 되게 하는' 새로 창조된 하나님만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자도,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 가치보다는, 돈 많이 벌고 복 받는 메시지가 성도에게 환영받는다. 기복주의. 이것은 한국교회의 신앙적 본질을 흐려놓는 주범이다. 종교사회학적으로 볼 때, 한국인의 종교적 밑바탕에는 무속신앙이 있다고 한다. 불교와 유교가 한국에 유입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불교와 유교의 본래의 모습을 잃고 샤먼적 종교가 되어 버렸다.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는 이러한 한국의 의식사상을 ‘비빔밥 철학’이라고 했다. 무속신앙이 혼재된 한국적 불교, 한국적 유교. 그리고 기독교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 A목사에 관한 제보가 접수됐다. 은퇴를 앞둔 A목사는 부흥사다. 지난 수십 년 간 본 교회 정규 예배 외에 타 교회 교인을 대상으로 목요부흥집회와 토요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그런데 최근 그가 네 명의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교회가 시끄러워졌다. 알고 보니 그간 A목사는 목요집회와 토요집회에서 걷어진 헌금을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라는 명목으로 가져갔으며, 교회 재정 횡령에 관한 의혹까지 있었다.

 

메시지는 어땠을까?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로 흰 옷을 입고 나오면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겠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하고, "지난주에 죽은 성도의 영혼이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고 있다"는 등의 설교를 수시로 하는 그야말로 사이비적이고 저속한 설교를 일삼아왔다. 결국 A목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근처 자택에서 다시 부흥집회를 시작했다. 어땠을까? 놀라운 것은 수십 명의 성도들이 그 목사를 따라가 함께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간 A목사가 성도들에게 있어 무당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무속적인 종교에 있어서 종교인의 역할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역할이다. 그의 삶이 모범적이지 않아도 되고 도덕적일 필요도 없다. 그저 신과의 매개 역할만 잘하면 그만이다. 신령한 목사를 요구하는 성도들의 심리가 여기에 있다. 부흥집회를 홍보하며 '40일 금식 몇 회' 하며 내세우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회개를 요구하고 죄를 지적하는 목사는 불편하다. 목사의 도덕성이나 윤리성도 중요하지 않다. 기적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홍보하고, 강한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압도하는 그런 목회자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능력과 카리스마로 결국 성도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사들의 능력으로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지고, 사업이 잘 되기를 기대한다. 능력의 종! 기복주의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목회자 아닌가? 이로 인해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민주적 구조 : 목사를 유혹하다

 

교회의 부패나 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목회자 개인이나 소수의 장로에게 너무나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과도한 권력은 부패한다. 인간은 죄인이다. 이것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다. 목사도 장로도 언제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존재이다. 방송에 보도된 B교회의 경우, 목회자가 교인 중 누구도 모르게 교회 건물을 담보로 수억 원을 대출 받아 땅을 샀다. 1년이 지나도 땅 값이 오르지 않자 다시 그 땅을 교회가 사도록 했다. 교회를 찾아가 장로들에게 물으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목사 혼자서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수십 년간의 관례라고 했다.

 

과연 이런 구조에서 건강한 목회자, 건강한 교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문제를 잠재시켜 놓은 채 가고 있는 것이다. 비단 재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운영과 의사 결정에 있어서 소수에게 주어진 절대 권한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비민주적 구조는 맘몬의 횡포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상담소에 접수되는 대다수의 사례는 이런 구조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교회의 비민주적 의결구조는 분쟁 해결에도 큰 걸림돌이 되어서, 수년간 교인들 간의 법정 소송을 유발하여 사회로부터의 비난을 더하게 한다.

 

한국교회의 희망 찾기

 

이쯤 되면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과연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인을 남겨두셨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우리의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다만, 우리의 죄악과 문제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비록 아프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한국교회의 희망을 이야기해보자.

 

첫째,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선포할 때 교회는 개혁될 것이다. 신앙의 변질과 교회의 부패는 왜곡된 성경해석으로 포장되고 정당화된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병폐를 근원적으로 치료해가려면 성도들의 눈이 환히 열리도록 올바른 성경해석을 정립해야 한다.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 늘 새롭게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며 기꺼이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건강한 중소형 교회의 확산과 그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교회의 개혁을 기대할 수 있다. 성장제일주의와 개교회주의 아래서 한국교회의 개혁은 요원한 일이다. 성장제일주의의 청산은 교회의 세속화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게 할 것이다. 개교회주의를 버림으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작은 교회들 간의 네트워크는 서로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며, 연대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일구어 냄으로써 교회의 보편성과 일체성을 회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내부의 민주적 절차 확보를 위한 정관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건강한 교회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와 권한 분배를 통해 현재 발생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를 상당히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개판 치는 목사가 왜 이리 많은가’라는 고은 광순 씨의 칼럼이 인터넷을 타고 확산되고 있다. 마치 해일처럼. 그 앞에 "세상에는 이런 교회도 있다"는 이의용 교수의 칭찬이 무색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본다. 한국교회가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그날에 온 국민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할 그 날을 위해 기도한다.

 

2008년. IVP <소리> 4월호.

Posted by 숙맥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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